An Architecture of Collective Authorship - The 'Chandigarh Style'
Maristella Casciato
OASE vol.113 <Authorship> pp.89-99
번역일: 2023년 7월 17일
요약 전문
"여러분이 새로운 도시가 생겨나는 것을 목도할 때, 도시가 어떤 모습을 갖추게 될지 궁금해할 것입니다. 어떤 도시도 단지 벽돌과 모르타르로 만들어진 건물들의 집합에 불과하진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찬디가르가 더욱이 흥미로웠습니다." - 자와할랄 네루, ‘찬디가르; 계획된 발전의 상징’ 1
1999년 1월 첫째주, 정치인, 건축가, 도시계획가, 건축역사가, 사회학자 등 80여명의 저명한 객원들이 ‘찬디가르’와 ‘아이디어의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한 글로벌 포럼에 모였다. 인도 푼자브의 새로운 수도를 위한 부지는 1948년 초에 선정되었고, 그해 3월 인도 독립 정부는 이미 부지의 구매를 비준했으며 1950년 말에는 르코르뷔지에를 마스터 플랜의 정교화 및 실행을 준비하는 ‘정부 건축 고문’의 임명으로 이끈 고난한 연구를 시작했다.
포럼을 뒤이어 출간된 450페이지에 달하는 출판물에서는 이항어로서 ‘찬디가르-양식’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찬디가르 아이디어’, 또는 새로운 인도-성(性)의 존재론적 바탕의 증명에 대한 활발한 논평이 오갔다. 르코르뷔지에의 계획이 현대 도시의 모델에서 이를 표명한 바 있다. 2그리고 1951년 12월 르코르뷔지에가 그와 더불어 미래의 수도에서 머무르고 일하는 세명의 시니어 건축가들 - 피에르 잔누레, 막스웰 프라이, 제인 드류 - 에게 맡겨진 막중한 과업에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의 요지는 ‘건축의 인도 양식은 없다’, 그러므로 ‘모든 노력과 계획안들은 실험이 수반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측은 국가가 짓는 과정에 존재하는 건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인도는 힌두교 사원 그리고 무슬림 사원 또 마하라자 궁전과 정원도 갖고 있다. 그러나 인도는 아직 현대 문명을 위한 건축을 만들어내지 않았다. 인도는 제2기계시대로 순식간에 도약했다. 우리는 우리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을테다: 인도에게 현대의 건축을 안겨주는 것."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디가르 양식’의 기원, 즉 응집력 있고 공유된 국가 건축 정체성을 전달할 책임과 결합된 공예 및 디자인 시스템 그리고 미학을 아우른 건축은 이들 건축가들의 이상 속에 잠재되어 있었다. 그 개념은 자신의 전문 이력을 수도의 탄생과 죽음에 연결 짓고, 그 문법을 펀자브 주 너머 델리와 아마다바드를 위한 변형된 규칙을 비롯해 초국가적 조건으로 확장시키는 디자이너들의 작업을 암시하기 위해, 저널리즘적 기사와 마찬가지로 역사-비평 문학에서 유포되고 반복되기 시작했다. 4여기서 몇가지 의문이 생긴다: ‘찬디가르 양식’이 실제로 존재했는가? 개인 또는 집단 저자의 특정 개념과 관련이 있는가? 또는 특정 작동방식을 나타내는 신분증이었나? 이 점에서 초창기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이것은 찬디가르에 분명한 성격을 부여하는 정부 주택… “찬디가르 양식”으로 명명될 것을 생산하기에 충분히 퍼진 영향력.’ 5
그리고, ‘찬디가르 양식’이 여러 디자인 전문가들에게 에이전시의 개념을 알려줬던 라이트모티브가 되었던 시기와 연결지을 수 있을까? 만약 두 용어의 조합이 쉽게 폐기될 수 있다는 특별한 장점을 갖는 모순어법을 만들어낸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조합은 수도의 정치적 프로젝트에 의해 암시된 건축 프로그램이 하나의 브랜드로 변형되어왔음을 나타낸다. ‘찬디가르 양식’은 창의적인 에너지를 번역한 과정들로서 거장 건축가의 서명이 새겨진 한편, 모더니티의 정의를 위한 조건을 만들어낸 실험 속에서 태어난, 탄탄하고 집단적인 사업의 결과물이기도 했다. 찰스 코리어는 훗날 찬디가르 학파로 간주된 것의 권위를 충분히 표현했다: “(그것은) 우리가 젊은 건축가였을때의 많은 기억과 찬디가르가 우리에게 부여하는 특별한 의미를 떠올리게 한다. 당시 우린 전국 각지에서 찬디가르를 방문하기 위해 일년에 최소 한 번씩은 순례자처럼 움직였다. 이따금씩 르코르뷔지에를 직접 만나 건축의 근본적인 교훈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6요컨대, ‘찬디가르 양식’ 모순어법에 대한 코리어의 반응은 다음과 같다: "오, 찬디가르, 찬란한 찬디가르여, 이 도시는 경이로운 효과의 기폭제임이 증명되었다. 오늘날 찬디가르 어휘의 대부분은 나를 포함한 민간의 건축실무에서 표준 양식이 되었다."
오늘날, ‘찬디가르 양식’의 정의의 범위와 건축적 문법의 측면에서의 그 성격, 그리고 찬디가르의 설립과 그 이후 실현되는 시기에서 특정 인물 또는 집단 양자가 보이는 저자적 특성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다. 한편으로는 르 코르뷔지에의 공헌이 있었는데, 그의 역할은 범상치 않은 계획의 실행을 훨씬 뛰어넘어, 기념비적인 행정 중심지인-그가 미래 도시가 될 부지에 도착한 초기부터 헌신했던-국회의사당 프로젝트에서 구체화되었다. 7르 코르뷔지에는 절대적인 건설 능력, 세련된 공간적 퀄리티, 주변 환경과 대화하는 능력으로 간주될 수 있는 건축 행위의 자금을 승인했다. 다른 한편, 잔누레와 프라이 그리고 드류로 구성된 3인조의 주요 시그니처로 여겨지는 저비용 주거, 학교, 상업, 공공 및 제도기관의 다양한 건축 유형이 통합된 주거 지역내의 건축도 있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건축가들만이 찬디가르의 수많은 건축 및 도시 공간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전적으로 새로운 수도를 설계하는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그들은 여러 명의 재능있는 인도 디자이너들-쉬브다트 샤르마와 마모한 나트 샤르마, 아디트야 프라카쉬, 울리 초두리(팀의 유일한 여성)과 협업했다. J.L. 말호트라, A.R. 프라바왈카르 그리고 B.P. 마투르 등은 찬디가르 수도 프로젝트 사무소(거장 건축가의 사무실로도 알려진 19구역의 디자인 에이전시)에 고용된다. 그러나 국회의사당, 주택, 공공건축을 위한 설계는 일련의 구체적인 지시들과 함께 새로운 건축적 관용구의 범주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문법의 해석과 변형을 직접 목격했던 비크람 파라카쉬는 ‘‘찬디가르 양식의 법칙’은 벽돌과 석재와 같이 지역의 재료만을 사용하며 단순하지만 혁신적인 구법을 채택해야한다…또 모든 재료는 장식되지 않은 채로 사용되어야 했다."고 말했다. 8
거장 건축가 사무실의 젊은 디자이너들은 유럽 건축가들의 권위에 약간의 망설임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환영받은 사람들 가운데, 시다트 샤르마와 아디트야 프라카쉬는 그들의 선배 건축가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했던 거장들의 언어를 따라잡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다. 프라카쉬는 (근대건축의) 복음서의 자명한 개념들로 사용되는 ‘모듈러’, ‘브리즈 솔레이유’같은 전문 용어에 주눅 들었다. (한편으로) 9제인 드류는 당면한 문제에 약간 다른 견해를 제시했다: "가벼운 비행기 형상의, 미스 반 데어 로에 건축의 부유하는 평면은 사라진다. 그보다 이 곳의 집은, 본질적으로 그늘이자 비바람으로부터의 피난처이다. 내외부를 상호침투하는 통유리창 같은 건 없다. 놀라운 기후적 다양성, 겨울엔 춥고 여름엔 고온건조 또는 습윤하며 모래 폭풍과 우기가 있는, 태양은 벗이라기보다 적인 경우가 많다." 10
오늘날 우리는 그녀의 진술에 암시된 ‘찬디가르 양식’과 글로벌화된 ‘국제주의 양식’을 대조시키는 태도에 미소 지을지도 모른다. 이같이 경험에서 우러난 숙고는 ‘찬디가르 양식’이 실제로 지시하는 것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을 그린다. 재료적인 기술인가? 건설 방식인가? 기후 특성인가? 장식에 대한 태도인가? 단독 또는 집단 저자성의 형태인가? 찬디가르 수도 프로젝트 사무소에 합류한 젊은 디자이너들은 그들의 작업이 물질적 내핍의 시학을 옹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조직은 초기 찬디가르 프로젝트의 형태와 비전을 근본적으로 뒤바꾼 혼란스러운 관용구, 건축적 방법론, 전문 기술을 소유한 팀의 형성을 뒷받침한 원동력이 되었다.
찬디가르의 작업은 불가피하게 초국가적이었고 필연적으로 설계 및 건설 과정의 다양한 측면과 관련이 있었다. 확실히, 1950년과 60년대 중반 사이 유럽의 거장들이 그들의 카리스마로 각종 건축 프로젝트의 실행에 힘을 실었던 건 초기의 일이었다. 르 코르뷔지에는 그의 파리 아뜰리에의 제도판에서 프로덕션과 실행의 장소 사이의 간극에 기반한 전문적인 대행 업무방식을 개발했다. 수백 장의 국회의사당 건물 도면이 여행 가방에 담겨 찬디가르에 도착한 후, 잔느레의 감독을 거친 후 프로젝트 책임이 있는 인도 건축가 팀에게 위탁되었으며, 그들은 건설 도면으로 변환했다. 이 방식으로, 찬디가르는 탑-다운과 바텀-업 방식 사이의 진동 속에서 존재하게 되었고 (현지의) 거장 건축가 사무소 건축가 및 엔지니어들의 제도용 책상 위에서 최종적인 윤곽을 획득하게 된다. 그들은 번역가 이상으로 현지의 헌신적인 저자들이었다.
15년간 국회의사당 프로젝트 건설 사업 전반을 이끌면서, 건설 방식을 현대화하고 집단의 요구를 살피는 총체적인 목표를 저버리지 않았으며, 합리성, 단순성, 효율성, 경제성, 최소 비용에 의한 혁신, 토착 문화의 존중의 가치를 불어넣은 피에르 잔느레의 공헌을 인정해야만 한다. 잔느레의 경영 방식은 르 코르뷔지에의 관행과는 어느 정도 모순되는 유형으로서 집단 저자의 형태를 만들어냈다. 잔느레의 정신과 헌신으로 활기를 띠던 현지 사무소의 경영 방식은 찬디가르의 공동 저작을 위해 필요한 기반을 제공했다. 젊은 디자이너의 유입에 따라 수년에 걸쳐 구성이 바뀌는, 다양한 팀들로 구성된 집단 저자성은 건설의 다양한 단계가 진행됨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경험이 증가하는 리더의 거버넌스에 의존했다.
끊임없는 협상은 현지 사무소의 협업 교류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가능한 갈등을 피하는 일련의 전략을 통해 집단 저자성은 선후배 건축가 간의 관계 문제였고, 각자가 정확한 위치를 차지하는 역할의 위계를 존중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국회의사당의 경우, 프라바발카르가 초기 단계부터 팀의 리더였던 것이 차이를 만들었다. 디자이너 눈에 ‘프리 마돈나’로 남아있던 르코르뷔지에는 그에게 서신을 보내고 고려해야 할 세부사항을 꼼꼼하게 언급했다. 르 코르뷔지에가 그의 사촌 피에르 잔느레의 거친 반대를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자주 프라바발카르의 지지를 구했는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찬디가르는 현지 문화에 변용된 유럽 모더니티의 건축적 이디엄과 지역 관습 및 실무에 의한 부득이한 굴절 사이의 진동 속에서 이 같은 방식으로 건설되었으며, 이 둘 모두 초기엔 프라이와 드류에 의해 실행되었다가 잔느레에 의해 통합된 조건으로서 집단 저자성이 확장된 과정을 통해 협상되었다.
르 코르뷔지에는 ‘거친’ 콘크리트를 도입했고, 잔느레는 벽돌과 석재 표면을, 맥스는 이 둘 모두를 혼합하여 도입했으며, 제인은 지역 전통에 그랬듯이 표면에 회반죽을 칠했다… 그녀는 토착 건축의 방식에 깊이 공감했다. 그녀는 여성 노동자들을 바라보며 "여왕들이 찬디가르를 짓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11실용적인 상상력과 농촌과 지역성으로부터 얻은 영감이 결합된 건축적 언어는 잔느레가 맡은 프로젝트에서 표현되었다. 이 작업들은 1960년대 후반 이후 찬디가르의 성숙과 ‘찬디가르 양식’ 공식의 성공을 이끌어낸 집단적 전문 실무의 기원이었다. 세브르가街가 1920년대 중반 ‘르코르뷔지에 스타일’ 발명을 위한 비옥한 토양이었던 것처럼, 현지 사무소는 ‘찬디가르 양식’을 낳았다. 일련의 비극적인 사건들 12로 특징지어진 1960년대 중반, 건축가 세대가 찬디가르를 20세기 현대적인 수도로 바꿀 뿐 아니라 ‘찬디가르 양식’을 협상되고 집단적인 저자성의 어휘들로 바꿀 수 있도록 하는 조건들이 무르익게 된다.
이것의 모범적인 사례는 박물관 클러스터-10구역에 계획된 정부 박물관 및 미술관, 국립역사박물관, 임시 전시 파빌리온(나중에 도시 박물관으로 변경)-를 들 수 있다. 1963년부터 르 코르뷔지에는 인접한 여가 유역의 녹지와 연속하면서 넓은 보행자 공간으로 열려있는 박물관을 만들기 위해 국회의사당에 도입된 기념비적 측면 중 일부를 재고하는 목표를 스스로 세웠다. 이때 거장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베톤 부르트(노출 콘크리트)를 버리고 벽돌로 지은 상자를 지지하는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 하중 지지 구조를 채택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 당시, 공사는 막 시작되었고 M.N 샤르마와 잔느레의 감독 아래 어린 쉬브다트 샤르마가 데뷔하게 된다. 디자인이 진척됨에 따라 계승된 인도의 모더니즘은 르 코르뷔지에 권위의 순수한 번역을 뛰어넘는 창조적 과정의 원천이 되었다. 쉬브다트 샤르마가 1970년대 도시 박물관의 디자인을 맡았을 때, 진정한 건축을 향한 그의 요구는 모더니티와 전통의 합성으로 완전히 발전되어, ‘찬디가르 양식’을 해석하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했다.
르 코르뷔지에의 말로 돌아가서, 디자인 팀이 처음에 책임을 진 건축은 ‘찬디가르 양식’로 자주 명명되고 곧이어 비판될 것의 윤곽을 제시했다. 노마 애븐슨은 프로젝트의 주요 참여자들이 아직 살아있으며, 도시의 성장을 규제하고 건축을 통제하는 규범적인 명명에 의한 흔적이 특히 주거 지구에 여전히 남아있을 때 주저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썼다: “찬디가르는 아마도 규정에 의해 지나치게 지배되는 데다, 빈약한 상상과 무감각이 함께해서 그 결과 시각적인 호소력도 기능적 실용성도 없는 도시이다." 13그녀는 인도 도시의 삶에 깊숙히 뿌리 내리고 더욱이 친밀한 구성요소에 관한 디자이너들의 인식을 보여주는 스케일과 미학의 부재를 한탄했다.
애븐슨의 판단은 장소와 그곳 주민들의 자연스러운 질서에서 발견되는 존재이유를 갖는 실천을 위한 여지를 남겨두기보다, 질서정연한 체계에 의해 작동하고 ‘건축적 통제’(재료의 지정)과 ‘프레임 통제’(정부 주택의 외부 형태의 정의)를 엄격하게 고수한, 찬디가르의 실현을 특징 짓는 기술-실용적 계획 문화를 예리하게 지적한다. 14애븐슨이 인도의 전통적인 도시를 참고하면서 찬디가르 계획의 중요한 배경과 틀, 즉 이것의 실현을 이끄는 집단적 생산 방식은 언급할 것 없이, 긴 여정의 시간과 개인적인 규모의 일상, 농촌 경제, 마을로 구성된 새로운 수도가 탄생하는 영토의 인류적 및 경관적인 특성에 대한 고려를 간과했음이 명백해 보인다. ‘찬디가르 양식’의 주요 특성 가운데 하나는 프로그램의 지역성과 현대의 서구 어바니즘에 내재된 아포리아를 결합할 수 있는 정신의 탐구에 있다: 찬디가르를 특징짓는 집단적 생산의 지속적인 협력 과정과 인도의 2세대 모더니스트 건축가들에 의한 실현.
나는 비크라마디티야 프라카쉬, 에밀리 퓨, 그리고 게리 리치로 폭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음을 밝힌다.
요약한 소감
건축을 공부하는 친구가 최근에 인도로 교환학생을 갔다. 나도 인도를 다녀와볼까 인도 건축물을 검색해보다가 (결국 다음에 가기로 했지만...) 최근에 샀던 <오아서>에 찬디가르 양식에 관한 기사가 실렸음을 알게 되었다. 저자성이란 주제 아래 인도에 수입되어 변형된 모더니즘 건축을 다룬 글쯤으로 파악하고 한 켠에 치워 뒀는데, 최근 정림건축문화재단에서 한국건축사 강의를 들으며 문득 떠올랐다. 인도의 상황은 잘 모르지만, 한국은 1930년대 일제에 의한 식민주의 양식과 일부 국제주의 양식의 건축을 잠시 생산했다가, 1941년 일본이 전시 체제에 돌입하면서 전반적인 산업 구조를 군수 중심으로 재편하게 된다. 제대로 된 건축 생산이 가능한 수준으로 회복하는데 시간이 꽤 걸렸을 뿐 아니라, 1960-70년대에 들어선 발전국가는 외화 유출을 막기 위해 해외 건축가의 설계를 허가하지 않았다. 대신 미스 반 데어 로에나 르 코르뷔지에로부터 사사받은 김종성, 김중업 등의 건축가들에 의한 모더니즘의 간접적인 이식이 있었던 것 같다.
그에 반해 비슷한 시기의 인도의 경우, 독립 정부가 새로운 수도 설계의 정부 건축 고문으로서 르 코르뷔지에를 임명하게 된다. 칼럼에 따르면, 파리의 르 코르뷔지에가 기본 설계를 하고 도면을 인도로 보내면, 그곳에 상주하는 서구 건축가 및 현지 건축가들의 생산조직이 실시 설계를 통해 국회의사당을 비롯한 수많은 건축을 계획 및 실현한 것으로 보인다. 따지고 보면, 인도는 모더니즘을 실천할 1차적인 매체(아이디어 드로잉)를 직수입(구체화 및 시공에선 불가피한 굴절이 일어나지만 적어도 최초 아이디어는 르 코르뷔지에를 직접 거치므로)한 셈인데 반해, 한국은 2차적인 매체(사사받은 한국인 제자의 아이디어 드로잉)을 자체 생산하거나 해외 소재의 1차적인 매체 자체 또는 그 실현안을 모방함으로써 굴절된 근대 건축을 생산한 셈이다.
그렇다면 당시 식민 체제로부터 해방된 인도 정부가 왜 서구 건축가에게 수도 설계를 맡겼는지 등의 궁금증은 차치하고, 근대건축의 생산방식의 차이로만 한정했을 때, 이로 인한 인도와 한국의 근대 건축 생산 및 도시 형성의 차이가 어떠한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인도가 거장 건축가의 아이디어를 직수입했다고 얘기했지만, 실현안들, 특히 푼자브의 <건축 박물관>과 취리히의 <르코르뷔지에 파빌리온>을 비교하면 굴절의 영향력이 건축의 인상을 확 바꿀 정도로 상당해보인다. 한국 근대건축의 신화로 불리는 이들 역시 당대의 근대건축을 한국에 많이 굴절시켜 실현했는데, 두 국가 간의 유의미하거나 현저한 차이가 있는 것일까?
또 인상적인 것은 능동적인 포지셔닝으로 모더니즘을 체득한 현지 건축가들의 태도와, 서구 세계의 전통(가부장제)과는 다른 현지의 풍토(모계사회)가 보이는 또 다른 근대(기)의 모습이다. 번역이 특정 상황의 아이디어를 다른 맥락의 언어로 이행하면서 발생하는 차이를 중재하는 기술이라고 할 때, 건축에서 일어난 모든 번역 가운데 이 칼럼이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에서도 활발히 번역된 건축이 생산된다고 생각한다. 번역의 정의를 조금 넓히면, 번역의 대상이 그 이전의 원본(이 역시 원본이 아닐 공산이 크지만)으로 명백히 존재하는지 여부로 판단할 수 있을 듯하다. 반대로 아주 좁혀 본다면, 유명 건축가의 설계를 사오는 행위를 일컬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최근 사태를 보면, 번역의 질(시공 수준)은 높아졌을지 몰라도 번역의 당위, 그리고 번역될 원본의 내용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지금 이곳에 번역을 하고 싶다면 다음의 질문에 먼저 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하필 당시 그곳의 아이디어인가?, 그러면 어떻게 번역해야 할 것인가?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 Speech at the inauguration of the Punjab High Court, Chandigarh, 19 March 1955, in: S. Gopal (ed.), Selected Works of Jawaharlal Nehru, second series, vol. 28 (New Delhi: Jawaharlal Nehru Memorial Fund, 2001), 26. [본문으로]
- Jaspreet Takhar (ed.), Celebrating Chandigarh (Ahmedabad: Mapin, 2002). [본문으로]
- Le Corbusier, letter dated 12 December 1951, P2-11-149-001/005, Fondation Le Corbusier Paris, quoted in: Madhu Sarin, Urban Planning in the Third World: The Chandigarh Experience (London: Mansell, 1982), 44. The letter was sent less than three weeks after Le Corbusier's return to Paris. The month before, during his second trip, the architect had met Nehru for the first time (22 November 1951) and was able to make up his mind about the most arduous aspects of the enterprise. [본문으로]
- On the transformation of the profession and the turn in modern Indian architecture, two books set the narrative: Jon Lang, Madhavi Desai and Miki Desai, Architecture and Independence: The Search for Identity: India 1880 to 1980 (Delhi: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Peter Scriver and Amit Srivastava, India: Modern Architecture in History (London: Reaktion Books, 2015). [본문으로]
- Quote from Norma Evenson in her seminal and pioneering book Chandigarh (Cambridge, MA: MIT Press, 1966), 47. [본문으로]
- Charles Correa, in: Takhar, Celebrating Chandigarh, op. cit. (note 2), 192; Charles Correa, 'Chandigarh: The View from Benares', in: Allen Brooks (ed.), Le Corbusier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7), 197. [본문으로]
- See the first pages of the 'Album Punjab' (February-March 1951), dense with sketches and reflections on the future Capitol. [본문으로]
- Vikramaditya Prakash, The Architecture of Shivdatt Sharma (Ahmedabad: Mapin, 2012), 11. [본문으로]
- Vikramaditya Prakash, OneContinuousLine: Art, Architecture and Urbanism of Aditya Prakash (Ahmedabad: Mapin, 2012), 60. [본문으로]
- Jane Drew, 'Chandigarh Capital City Project', Architects' Yearbook 5 (1953), 65. [본문으로]
- Comments by architect Aditya Prakash, in: Prakash, The Architecture of Shivdatt Sharma, op. cit. (note 8), 63. [본문으로]
- Nehru's death in 1964, and, in the following year, the assassination of Partap Singh Kairon, Chief Minister of Punjab, the passing away of Le Corbusier, and the imperative decision of Pierre Jeanneret to return to Switzerland. [본문으로]
- Evenson, Chandigarh, op. cit. (note 5), 92. She explains that the requirement of the construction of government housing in terrace formation, termed 'Frame Control', consisted 'in fixing the extend and height of the party walls and a top course connecting these, thus forming a frame [본문으로]
- 'Façade Control' and 'Special Controls' are equally part of the standards included in clause no. 4 of the Capital of Punjab (Development and Regulation) Act, 1952. See: Aditya Prakash, 'Architectural Control, Shops, Flats etc...’, Marg Magazine 15/1 (December 1961), 39-41. In contrast, Le Corbusier and Pierre Jeanneret had introduced the theory of the 'Modulor', a geometrical apparatus to generate and control form.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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