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journal/lecture

현대 건축사 강의 2회차 <발전 국가와 건축가: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와 대한주택공사>

by sirokryu 2023. 7. 20.

여름특강 2023: 현대 건축사 강의 2회차

발전 국가와 건축가: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와 대한주택공사

강연자: 박정현 건축비평가

시간: 2023년 7월 12일 17-19시

장소: 정림건축문화재단 1층

주최: 정림건축문화재단

 

강의개요:

독재와 발전국가 체제가 자리 잡은 1960~70년대, 정부는 최대 건축주인 동시에 여러 설계 조직을 직접 운영했다. 1960년대 초중반 설립된 대한주택공사와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는 국가 주도의 대형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대표적인 공기업이었다. 이 속에서 많은 건축가들이 민간 영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규모의 사업을 실행했고, 때론 실험적이고 몽상적인 프로젝트를 펼칠 예외적인 기회를 누렸다. 국가와 건축가의 관계를 통해 한국 현대 건축의 특이성과 보편성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출처: 정림건축문화재단 http://forumnforum.com/archives/4542


아래는 강의 녹음본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강의 전문이다. 자의적으로 문단과 목차를 구분했으며 개인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 부분에 붉은 강조를 주었다. 이 과정에서 불가피한 생략, 요약, 왜곡을 거쳤기에 강연자의 의도와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오해의 여지가 있다면 전적으로 작성자의 책임이다. 현장 분위기도 나름 중요하다 생각해서 다소 방만한 요약이 된 점 이해 바란다. 또한 이 게시물은 거듭 수정될 수 있음을 밝힌다.

 

0. 도입: 강의의 취지

제가 10여 년 전 대학원생 시절일 때 서울시립대 배형민 교수님, 서울대 전봉희 교수님, 그다음에 한예종의 우동선 교수님 연구실이 합쳐서 전국 4,5년제 대학교에 건축역사 교과목이 어떻게 편성되어 있는가 전수 조사를 했습니다. 10년 전 데이터라 지금도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학부 수업에 한국근대건축사를 가르치는 학교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근대건축사를 어떻게 설정하는지에 따라 조금 다르겠지만. 식민지 시기나 개화기 시절 수업은 있었던 것 같은데, 1945년 이후에 한국현대건축만을 갖고 16주 한 학기 수업을 하는 학부는 없었던 것 같아요. 지금 얼마나 바뀌었는지 모르겠는데...있어봐야 아는 두 분도 있을까 말까 정도고. 아마 다 건축학과 학생분들이니까 아시겠지만 학교 다니면서 한국현대건축사 배우는 학교 있어요? 없는 것 같아요. 그 공백이 분명히 있는 건 사실이고 어떻게든 메워야 되는 시점이 된 것 같습니다.

 

이 주제를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해보자 하는 게 이 수업의 목표였고, 수업 전체를 다 포괄할 수 있는 분 물론 계시겠지만, 그보다는 각자 조금 더 특화된 영역에서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해보자 하는 게 이 수업의 목표였고 그래서 일곱 분의 선생님들, 나이 차이가 조금 있긴 하지만 아직 조금 젊은 축에 드는 분들이고, 건축가에 속해 있는 여러 분야 중에서도 남자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분야가 역사 분야입니다. 역사 이론 비평가들 중에 한국에서 활동하는 여자분들이 거의 없는 게 사실이에요. 그러면 안 된다. 발굴하자, 그리고 충분히 많다 더 훌륭한 선생님들이 있다 라고 생각을 했고요. 그래서 최대한 맞추려고 노력을 했어요. 산술적으로 맞추려고 하는 게 아니라 훌륭하신 선생님들이 계셔서 모실 수 있었던 것 같고 그래서 아마 지난 시간에 이연경 선생님께서 주자라 시간 준비할 시간도 제일 없었을텐데 어떤 의미에서는 제일 예민한 분야를 또 오늘 해 주셨을 거예요.

 

 

1-1. 서론: 20세기 한국 건축사에서 근대건축modern architecture은 없었다?

저는 못 들어서 너무 아쉬운데 여러분 잘 아시겠지만 일제가 남긴 유산 유무형의 유산에 대해서 어떻게 입장을 취하는지는 지금도 굉장히 예민한 문제고 인생을 걸어야 할 수도 있는 거란 말이죠. 그래서 그 시대를 이연경 선생님이 해 주셨습니다. 제가 오늘 다루려고 하는 시기가 따지면 60년대. 그리고 60년대를 어떻게 규정하는지도 일제시대 때만큼은 아니지만 정치적 색깔을 묻는 것과 굉장히 유사한 갈림길에 서 있어요. 그래서 60년대를 약간 옹호하는 식으로 쓰면 쟤는 젊은 애가 대한 지금 수구 꼴통이구나. 욕을 대번에 들어 먹기 쉬운 영역.. 박정희 시대를 다루니까요.

 

강의 제목이 '현대 건축사 강의'잖아요. 이거 제가 정한 건 아니고, 사무실장님께서 그냥 정해 주신 것 같은데 약간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한국'이 없어요. 보통 현대건축사 많이 하면, 다 서양을 염두해 두는 거잖아요. 그래서 한국현대건축을 다룰 때 언제나 한정사가 들어가야 되는 게 대부분인데 일부러 빼신 거죠? (김상호 사무실장: 네 맞습니다) 그런데 한국이 빠진다 하더라도 문제가 굉장히 복잡하고 이제 헷갈리는 이슈가 있죠. 모던을 어떻게 해석할 건가? 하는 이슈가 있습니다. 한국이. 물론 이제 이 모던이란 용어에 대해 7분 선생님들마다 입장차가 다 다를테고 근대 또는 현대에 좀 더 친한 선생님들이 있을 것 같아요. 이 모던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그리고 이 모던을 어떤 기준으로 어떤 증거로 이해를 해야 되는가 하는 이슈가 있을 텐데요. (제 입장으로서) 분명한 하나는 어떤 물질적 토대나 산업적인 측면을 빼놓고 현대 건축을 말하기는 힘들다라고 하는 생각이 들어요.

 

1955년도에 미국 사람이 찍은 사진인데요. 문경 시멘트 공장 사진입니다. 운크라unkra라고 한국 재건을 돕는 유엔 산하 기구로  실질적으로는 미국 주도의 기반이었습니다. 1955년 당시에 남한에서 가장 큰 공장이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한국에서 여러분들이 20세기 현대 건축에 관해서 배울 때 이제 서양 중심의 현대 건축을 배울 때 19세기에 철 구조물이 등장하고 20세기 여러 기계화 공장 생산이라고 하는 산업 시스템이 등장하고 그 사회 변화에 맞서는 미학적 차원에서 모더니즘들이 얘기들을 많이 한단 말이죠. 그런데 한국에서는 저 구조가 성립하지 않는다. 노골적으로 말하는, 그러면 한국 모더니즘이라고 하는 거 어떻게 설정할 수 있는가라고 하는 질문이 대번에 들죠. 그래서 20세기 한국 건축사에서 모던이 근대가 현대인가 저는 이게 굉장히 이슈라고 생각이 들어요.

 

 

건축 역사 이론 비평만 다루는 학회가 하나 있는데요. 작년 학회에서 추계 학술대회 발표 논문에서 정만영 교수님께서 <국근대건축인가?, 한국근대기건축인가?>라고 하는 글을 발표를 하셨어요. 그 얘기를 여기서 다 이야기는 못하지만 "사회=경제적 근대화와 건축과 예술을 규정하는 근대주의는 동시대에 속하지 않고, 각자 향하는 방향도 다르다. 따라서 근대기의 건축이 곧 근대건축이라는 가설은 비-실증적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식민지 근대화는 그 자체가 식민지 지배와 수탈이 용이하도록 왜곡된 근대화이기 때문에, 이에 상응하는 근대성이나 근대주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거고 그래서 요점은, 여기 보시면 돼요. "이 구도에 따르면 근대건축modern architecture는 지시 대상이 변하지 않는 고유 명사다." 대단한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건 제가 하는 말이 아니라 따온 인용을 보면, "20세기 초에 정점에 도달했던 아돌프 로스, 르코르비지에,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바우하우스의 근대 건축만이 진정한 근대 건축이고 나머지는 여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후는 "현대건축")" 동의하실지 안 하실지는 모르겠어요.

 

근데 이런 생각이 꼭 정만영 선생 혼자만의 생각은 아닌 것 같고 김성홍 교수님께서 2016년에 쓰신 글에 보면 중간에 보면 여기만 읽어볼게요. “1945년 광복에서 1950년대 중반까지 현대 건축의 과도기를 보고자 한다.” “역사적으로 하나의 고전이 된 서양의 근대 건축(modern architecture)은 고유명사인 반면, 현대 건축(contemporary architecture)는 전 세계 어느 곳에서나 수용되는 일반 명사”라고 하는 이렇게 설득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한국의 저런 입장에 따르면 한국에 근대 건축(modern architecture)은 없는 거에요. 모던이라고 불리던 시대에 그냥 건축 행위이 있었으니까, 여기에 보이는 것처럼 1945년 광복에서 1950년대 중반까지는 현대건축의 과도기이고 이 이후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다 현대건축contemporary architecture라고 생각한다라고 하는 건데. 저는 동의가 잘 안 되는 편이에요. 그러니까 모던을 고유명사로 두고 컨템포러리를 저 시대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는 입장으로 쓴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 같고 제 입장에서는. 그런데 이 입장이 한국 건축에만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1-2. 서론: 같은 해방, 다른 상황을 맞닥뜨린 한국 미술계와 건축계

지금 며칠 안 남았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1960년대, 70년대 한국의 실험 미술에 관한 전시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관심 있는 분들은 가보시면 좋을 것 같고요. 그 도록에 보면 1960년대에 이경성이라고 하는 당대 평론가가 한국 예술가들한테 이런 말을 해요.  "(...)그래서 해방 이후 한국 미술은 근대화의 철저한 단절이라는 전제 하에 새로운 현대 예술을 써갔다." 그래서 이 말은 모던mordern 대신에 현대성modernity의 수립인데 이게 컨템프러리contemporary는 아닌 거지만, 기본적으로 미술계에서는 일제 시대부터 내려왔던 근대를 60년대에 철저히 부정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것 같아요. 오늘 제가 다루려고 한 시절과 얽혀 있거든요. 그런데 이제 재미있죠. 컨템포러리는 아니고 정의 실험에서 실험 미술로 조수진 선생님이 쓴 글의 제목이 대안적 한국 모더니즘의 역사라고 하는 건데, 요는 미술계에서는 1960년대에 새롭게 모더니티든 모더니즘이든 뭔가를 새로운 어떤 실천, 이념 등을 추구할 때 없애야 할 주적이 있었어요. 그게 일제시대부터 내려왔던 근대, 그러니까 그때 미술계 내에서는 일제시대 때부터 관에서 주도했던 국전이라고 하는 제도가 있고 그 안에서 미술계에 의해서 굉장히 위계적이고 특정한 형태의 대화들을 강요했기 때문에 앵코르멜이나 실험 미술이나 이런 새로운 흐름들을 그 이전에 예술과 구분하고 그걸 극복해야 될 근대, 획득해야 될 현대로 이렇게 구분하는 구조가 설정이 돼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한국 건축계는 약간 독특한 현상인 것 같아요. 다른 분야와 달리 무슨 얘기인고 하니 일제 시대 때 있었던 제가 지난주에 이연경 선생님 수업 들었어야 이런 실수를 안 하는 건데, 일제 시대 때 남은 유산들이 그렇게 60년대의 실천을 억누를 만큼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식민지 잔재의 청산이 욕구가 그렇게 크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많은 경우에 월북하기도 했고요. 그다음에 일제시대 때 교육 기관 중에 경성 제대 안에는 그니까 대학교 안에는 건축가가 없고 경성 고공이라고 하는 약간 2차 교육 기관이죠. 제일 최상위 교육기관은 이제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이고 그거에 미치지 못하는 경성 고공 안에 건축가의 실무를 중심으로 디자인보다는 실무를 중심으로 한 건축 교육 체제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일제 시대 때의 배출된 한국 건축가들이 엄청나게 권위를 행사하면서 한국 건축가를 다 붙잡고 있었던 상황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 해방 이후 한국 미술계는 건축계와 달리 일본에 의한 근대화를 진정한 근대의 역사로 인정하지 않고 이와 철저히 단절 하에 현대의 역사를 새로이 쓰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

 

1955년도에 제4회 국전 건축물 초대 작가 및 추천 작가 수상자 목록인데요. 초대 작가는 경력이 한 30년 된 사람 만 들어가는 미술계에 이제 초대 작가예요. 근데 이제 건축계는 이제 워낙 인맥 풀이 좁아서 이천승 지가 초대 작가에도 들어가고 심사위원회도 들어가고 입선에도 들어가요. 그러니까 정말 풀이 좁은 거에요. 이천승 선생이 1909년생인가 그런데 55년 해봐야 저보다 젊잖아요. 굉장히 젊은 사람이었단 말이죠. 그리고 이 미술전 안에 건축이라고 하는 걸 이해하는 방식도 굉장히 독특해요. 제출된 설계도면 입단면들 여러 개 있었을 거잖아요. 얘가 7점이라고 치는 거예요. 도면 하나가 작품 하나.. 미술품처럼 그다음에 김정식, 유정철, 지순, 오경태 이분들이 답사 가 가지고 절에 답사가서 절간을 이렇게 그린 스케치를 작품을 내요. 그런데 얘를 국전에서 대한민국 건축대전의 전신 같은 거예요. 여러분 대한민국 건축대전에서 답사 가서 그린 그림 내면 안 뽑아주잖아요. 그런데 이 시절에는 뽑아주던 시절이었었던 거예요. 이건 이철승 선생이 참여했다라고 주장하는…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뭔고 하니 60년대 한국의 건축계에서는 극복해야 될 근대 또는 식민주의가 굉장히 부재했다. 약간 공백처럼 남아 있었던 거고 모더니티 모더니즘은 한국 현대 건축이라고 하는 게 여전히 암중 모색, 어떤 거를 해야 되는지 잘 모르던 시기가 50년대, 60년대 이어지지 않았나라고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결국 모던 아키텍처는 이제 역사 쓰기의 결과라고 하는 거라는 말을 다시 한 번 담지(?)드리고 싶고요. 그러니까 모던 아키텍처가 그 자체로 있는 게 아니에요. 그것은 언제나 담론 투쟁의 결과입니다. 그 사태가 고유하게 있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저 형태로 썼고 그 쓴 걸 지금 제가 배웠고 저희 세대가 다시 여러분들한테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거죠.

 

 

1.3 서론: 서구가 현대건축사를 쓰던 방식

 

 

그 대표적인 책들을 보면 1936년에 니콜라스 패브스너가 쓴 <근대건축운동의 개척자들>이라는 책이 (나중에 모던 디자인으로 책 제목이 바뀌기는 했지만) 1936년도에, 그러니까 2차 세계대전 직전에 쓰여진 이 책이 지금까지 절판 없이 계속 출간이 되고 있죠. 이런 책이 대표적으로 현대 건축의 19세기의 양식주의 건물에서 혼란을 겪고 현대 건축이 어떻게 새로운 표준적인 양식으로 등장했는가를 논증하는 책이란 말이죠. 근데 제목이 재밌죠. from 윌리엄 모리스 to 발터 그로피우스. 1914년도 전시회에 출품되었던 파구스 공장이 이제 현대 건축의 승리를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대표적인 작품이고 그 시발점은 1850년대에 영국에서 시작된 미술 공예 운동의 윌리엄 모리스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여러분, 많은 현대 건축사 수업 시간에 첫 시간이 윌리엄 모리스의 아트 앤 크래프트부터 시작하는 까닭이, 이런 역사 다 틀렸다. 우리가 엉터리를 배우고 있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이걸 배우는 까닭이, 이 역사 쓰기의 결과다라고 하는 거를 잊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재밌는 거는 여러분, 이 책 보신 분들은 많지 않으시겠습니다만, 윌리엄 모리스는 영국 사람이고요, 그로피우스는 독일 사람입니다. 근데 이 책에서 보면 국적이 그렇게 의미가 없어요. 국가가 전면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1927년도에 바이트 쿠르트 베렌트라고 하는 사람이 쓴 책도, <새로운 건축 양식의 승리>라고 하는 책, 이게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렸던 전시회를 앞두고 쓰였던 책인데요. 여기서도 건축이 상대하는 어떤 대상, 즉 대타자죠. 건축이 누구랑 상대하면서 생산되었는가라고 물으면 그때 국가는 빠져요. 독일이 어땠고 영국이 어땠고가 중요한 게 아닌 거죠. 여기서 설정된 바탕은 유럽이라고 하는 어떤 보편적인 시민사회의 그물망으로 연결된 동네가 있고 물론 이 유럽도 굉장히 제한적인 유럽이죠. 스페인, 스칸디나비아, 폴란드, 헝가리를 다 안 끼워주고 중부 유럽의 몇 나라 정도만 포함되니까요. 그 유럽 시민사회 속에서 등장했던 어떤 예술 또는 문화 양식으로서의 건축을 설정을 한단 말이죠. 건축에서만 그런 게 아니에요. 토마스 만의 소설 <부덴 부로크가의 사람들>(1901) 같은 거 보면 독일이 중요한 게 아니고 뤼벡이라는 도시가 중요한 것 같아요. 국가보다 훨씬 더 오래되고 예술을 상대하는 어떤 시민사회의 근간이 되는 건, 도시 또는 시민사회. 그다음에 공론장 이런 것들이란 말이죠. 그래서 서구 사람들한테 이런 구도가 쉽게 안 없어지는 것 같아요. 

 

케네스 프램턴은 영국 사람이고 미국에서 활동했을텐데 이분 30년생이니까 나이가 정말 많으신 분이잖아요. 이분이 쓴 모던 아키텍처가 1980년도에 나왔다가 최근에 5판이 나왔어요. 이 책을 기념하는 어떤 전시회에 또 각국의 언어로 번역된 걸 찍은 사진인데 한국어판이 없더라고요. 전시 준비를 잘 못했구나 이런 생각을 했고(...) 근데 이 책의 구도도 똑같습니다. 이 책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게 5판의 차례인데요. 1750년대부터 이렇게 철 구조물과 온갖 얘기들 하다가 유명한 건축가들의 얘기들 그다음에 사조들 얘기들 여러분들이 현대 건축 수업 시간 열심히 배우는 그 온갖 192,30년대에 모더니즘에 여러 경향들을 쭉 언급하다가, 뒷부분 가서는 어떻게 되냐. 그전까진 국가가 전면에 드러나지 않아요. 국가가 중요한 게 아니고. 그냥 현대 건축이라고 하는 게 보편적인 현상인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가 나중에 이게 최근에 2020년에 5판 추가되면서 붙은 건데요. 여기에 와서 이제 봉착하는 거죠. 이런 식으로 더 이상 쓸 수가 없고 좁은 유럽 중심으로 쓰다가 이제 안도 다다오도 언급해야 되고, 라파엘 모네오도 언급해야 되고 전 유럽으로 전 세계로 모던 무브먼트가 확장되어 나가는 그 과정을 서술하기 위한 고육지책의 일환으로 5판의 4부 맨 마지막에 보면 국가별로 쪼갭니다. 미국, 북미, 아프리카와 중동 아시아와 태평양 유럽 굉장히 독특한 구도죠. 여기에 처음으로 한국이 등장하게 되고 이런 구도 속에서 글이 전개가 되는 거죠.

 

그런데 케네스 프램턴는 모던 무브먼트modern movement라는 말을 지금도 써요. 그러니까 현대건축이 갖고 있었던, 버리지 못하던 어떤 이념과 이상이라고 하는 게 있고 이는 우리가 끊임없이 추구해야 될 모던 무브먼트(의 목표)라고 설정하시는 거죠. 생각해 보면 영원히 안 끝나는 프로젝트인데. 돌아가시면 제자가 다음 판에서 쓰는 건가? 생각이 드는 거죠. 그래서  대번에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버마스가 1980년에 썼던, "현대성은 미완의 기획이다." 라는 테제를 설정하고 포스트 모더니즘이 나올 때, 모더니티를 옹호하면서 썼던 글이 있거든요. 그 글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런 구도 속에서 그러니까 유명한 거장들의 이름 그다음에 주요한 건축 사조의 흐름들로 한국 현대 건축을 이 얘기들을 쓸 수 있을까. 저는 쓰기가 힘들다, 저 구도로는 20세기 한국 현대 건축을 쓰기가 굉장히 곤혹스러울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서구 입장에서도 너무 긴 얘기겠습니다만 미술사 전통에서 건축사가 나왔습니다. 미술사가 독일 관념론 전통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는 지적 흐름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정신적이고 이념적인 걸 더 중요하게 여기지, 실제로 이렇게 지어지는 것. 공장, 중화학 공업 이런 거 안 좋아하거든요. 여러분 이건 많이 보셨을 수도 있죠. 엘 리시츠키의 아스노바 그다음에 현대 건축가 연맹의 SA의 커버, 20세기 소련의 소비에트의 아방가르드 또는 구축주의 이런 것들을 학교에서도 가르치고 하지만 정작 1933년도에 트랙터 플랜트를 누가 지었는지 안 배운단 말이죠.

 

그래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런 식으로 이념과 아이디어 그다음에 거장들의 건축과 연대기 즉 서양 건축사를 서술하는 기본적인 전제가 되는 방식으로는 이후의 역사를 서술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의 역사쓰기는 이것과 대척점에 있는 거죠. 아방가르드와 국가가 분리되어 있고. 소련의 구축주의 전통이라고 하는 거는 스탈린이 폭력을 저질렀던 소련 국가랑은 별개로 구분하는 거죠. 긴 얘기는 못합니다만 소련에서 건물 지을 때 아방가르드 건축가들 안 부르고 실무 건축가 불러서 작업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담론의 영역과 국가 주도의 계획 경제 같은 것들이 구분된 걸 전제로 하고 서사를 쓰죠. 그러다가 1933년에 스탈린이 집권한 다음에 이제 러시아 구축주의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변모했다는게 표준적인 서사 같은 거잖아요. → 소련의 경우, 아방가르드 담론영역과 국가주도 계획경제를 구분했다.

 

 

2-1. 본론: '발전국가'로서의 한국

 

왼쪽은 <공간> 창간, 1966년 11월 / 발행인 석정선 (왼쪽), 포항제철소 1고로의 첫 출선 모습, 1973년 (오른쪽)

 

이제부터 한국 얘기를 하는 건데요. 한국은 1960년대 적어도 70년대까지 1966년 11월에 창간되어 지금까지 출간되고 있는 <공간>이라는 잡지(담론)하고 포항제철 용광로(발전국가)의 구도가 구분될 수가 없다. 구분해서 설명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게 제가 오늘 여러분들한테 드리고 싶은 이야기죠. 저랑 나이가 비슷한 분이 여기 많지는 않지만 전 포항 제철을 수학여행을 가서 가본 적이 있어요. 지금은 이런 데 안 가시잖아요. 왜 꼬마들을 데리고 갔을까 이런 것들이 이제 생각하는거죠. 발전국가라고 하는 말이 뭔가라고 하는 말을 간단하게 설명을 드리고 넘어가야 될 거 같아요. 경제 개발을 꿈꾸지 않는 국가는 없잖아요, 또 국가가 어떤 모종의 경제 정책을 규제를 통해서 관리하지 않는 곳도 없죠. 예컨대 미국이 자유시장 경제를 주장하는 것 같지만 독과점법 같은 것은 우리나라보다 비교도 못할 만큼 다양한 시스템을 갖고 있잖아요. 한국의 경우 규제 국가가 아니고 계획 합리적 국가였던 건데요.

 

무슨 얘기인고 하니 영국을 비롯한 외국 사람들이 보기에 1960, 70년대 지나고 나서 일본이 경제 성장을 급격스럽게 이룩하니까 얘네들이 그걸 설명할 방법이 없는 거죠. 왜냐하면 서구의 사회과학의 모델은 국가와 시민 사회와 경제가 약간의 서로 자율적인 영역을 설정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베버의 자본주의를 어떻게 설명하나요? 국가 주도의 개발 경제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치, 이렇게 설정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구도로 보면 일본의 경제 성장을 설명할 방법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 찰머스 존슨Chalmers johnson이라고 하는 사람이 일본의 통상산업성이라고 하는 경제 기구 조직을 열심히 연구해 가지고 만들어낸 말이 발전국가예요. 발전국가라고 하는 건 뭐냐면, 경제 성장의 효과를 분산시키는 쪽으로 자본이 사용되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모든 걸 다 관장하는 국가를 칭하는 거예요. 그래서 찰머스 존슨이 이 책을 쓰고 난 다음에 일본이 경제 성장하고 난 다음에 등장한 국가가 어디겠어요? 한국이잖아요.

 

 

한국을 연구한 사람이 엘리스 앰스톤이라고 하는 사람이고 이분이 경제 기획원을, 찰머스 존슨이 통상산업성을 연구했던 것처럼 엠스톤이 경제기획원을 연구에서 글을 써요. 한국도 발전 국가 모델로 설명을 하는 거예요. 한국의 경제성장이 그냥 단순히 일어난 게 아니라 경제기획원이라고 하는 지금의 재무부 그다음에 예산 담당하는 기재부, 재무부, 온갖 것들이 다 통합되어 있는 무소불위의 국가예요. 그러니까 경제 기획원에서 예를 들어서 삼성한테 너네는 이거 생산하지 말고 저거 생산해라. 기아자동차한테 너네는 승용차는 생산하지 말고 트럭만 생산해. 포항제철한테 너네는 철골 생산하지 말고 철판만 생산해. 철판을 만들어야 조선소와 자동차를 만들어서 수출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국가가 모든 걸 다 통제 관리하는 경제 시스템을 말해요.저희 세대는 이게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라 별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이 모델이 있는 거죠. 그래서 이제 이 발전 국가라는 말을 쓴다고 해서 개혁 합리적 국가라는 말을 쓴다고 해서 국가 개혁이 언제나 합리적이라는 것이 아니고, 아까 말씀드린 대로 시민사회, 경제, 국가. 이 서양 사회학에서 생각하는 세 개의 어떤 연결망 속에서 시민사회가 굉장히 ??? 한국의 본격적인 시민사회는 1989년 이후에 생겨났다라고 하는 게 많은 한국 사회학자들의 진단이잖아요. 그러니까 시민 사회가 거의 없고 국가가 모든 걸 다 통제 관리하는 상황인 거죠.

→ 한국은 시민사회에 앞서 국가와 경제가 출현했다는 점에서 서구와 궤를 달리한다.

 

 

그래서 건축이 산업 생산 시스템하고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모던 아키텍처의 생산 조건이 국가 경제 정책하고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라고 하는 거고요. 잘 아시다시피 1960년 4.19 혁명으로 시작해서 정권이 1979년 12월 12일에 쿠데타로 끝나죠. 그리고 1961년 516 쿠데타 박정희, 1960년에 한국 1인당 gdp가 156달러 지금 3만 불 넘는 상황이잖아요.79년도에 박정희 정권이 끝나던 시절의 gdp가 1783달러예요. 그러니까 지금 생각하면 1988년도에 서울 올림픽을 한국이 어떻게 했나. 1인당 국민소득이 6천 달러도 안 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일들이 있었는가 하는 생각들을 하면서 얘기를 해볼까 싶어요. 이건 제가 1964년에 한국이 어떤 사례인지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이미지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1961년도에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박정희가 군대로 복귀하고 63년도에 평화적인 선거를 통해서 인간에게 정권을 이양하겠다라고 하는 목표를, 그러니까 공약을 내걸고 쿠데타를 한 거잖아요. 중간에 마음이 바뀌었고 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자기가 대통령 후보로 나왔단 말이죠. 기호 3번 이 짝대기에 더 주목하셔야 돼요. 당시에 한국은 완전 농업 국가였기 때문에 황소가 정말 중요한 동력원이었었잖아요. 그러고 나서 60년도에 당선되고 63년 11월 26일 날 6대 국회의원 선거가 열려요.박정희가 이병래라고 하는 민주공화당 국회의원 후보의 이제 지원 유세를 갔는데 그 당시에 정당들이 난립했던 모양이에요. 기호가 12번이에요. 그런데 이 커다란 현수막에 아라비아 숫자가 없어. 그 당시에 한국인들이 저 농촌 사회에서 아라비아 숫자를 몰라요. 63년부터 한 7년 정도 지난 8년 지나서 삼선 개헌을 하고 영구 집권을 누린 박정희가 1972년 유신 직전에 대통령 선거에 나갔는데 김종필씨가 지원 유세를 하는데 황소가 사라졌죠. 이 포스터에 각종 석유화학 중화공업 기간시설이 대신합니다. 이 포스터 속 시설들을 누가 했는가, 김수근이 사장으로 있던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에서 다 했다는 겁니다.

 

 

2-2. 본론: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기공)의 출현과 구성원

1960년대 언저리부터 80년대까지인데요. 오늘 저희는 63~4년도부터 69~70년까지 다룰 꺼거든요. 초록색은 육사출신, 빨간색은 만주 육사출신. 이건 일제가 만든 육군사관학교를 다녔다는 것이고. 그러니까 친일파, 박정희를 비롯해 자기가 출세하기 위해서 만주에 넘어가 일본이 만든 군사학교에 다니고 거기서 이제 소위로 임관했던 사람들이잖아요. 그 사람들이 다 실권을 잡고 있던 시기 그래서 1960년대에 한국을 1930년대의 만주에 빗대서 모더니즘 연구하시는 역사학자들이 계시잖아요. 마찬가지로 이 회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육사 사람들인데 김수근이 유일하게 민간인이에요. 68년 4월 9일부터 69년 7월 22일까지 김수근이 사장을 해요. 그리고 건축계의 김수근보다 도시계획과의 주원 선생이 훨씬 더 오랫동안 실권을 장악하고 국토계획 학회를 이끌었던, 대부 같은 존재가 있거든요. 이 분이 잠깐 건설부 장관을 했던 거 말고는 전부 다 전부 다 육사 출신이에요. 그러니까 육사 출신이 한국을 통째로, 지금 검사 출신이 한 것보다 더 하게 됐던 거예요. 그런데 당시 육사가 한국에서 어떤 교육기관보다 더 우수한 교육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수 있어요.

 

오늘의 핵심 인물 핵심 시기는 육사 8기인데 1949년도에 이제 임관을 했는데요. 정말 많죠. 미군정이 1948년도에 끝나고 처음으로 뽑은 세대들 중에 하나인데 어차피 징집을 당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기왕이면 장교로 가자 해서 무려 육사 8기가 1263명으로 역대 최대 명수를 자랑해요. 그런데 1950년에 한국전쟁이 터지니까 이분들이 전부 다 전장에 나가고 많이 죽었어요. 군대 다녀오신 분들 있으시겠지만 힘든 일 같이 할 때 가끔 착각이 들잖아요. 전우애라는 게 있을 수 있구나. 전쟁을 함께 겪은 세대가 굉장한 어떤 결속력을 자랑하게 되죠. 절반은 죽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굉장한 결속력을 갖고 있다가 나중에 1961년도에 군사 쿠데타의 핵심 세력이 됩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김종필 씨. 대통령 빼고 한국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하죠. 육사 8기의 브레인 중에 브레인이었고. 그다음에 중앙정보부장 하다가 권력 암투 투쟁으로 79년도에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김영욱도 있고요. 그다음에 대한주택공사의 초대 총재를 맡았던 장동훈 씨도 같은 기수에요. 그다음에 오늘의 주인공 중에 한 사람이 석정선 선생인데 생물연도는 알 수 없지만 비슷할 겁니다. 이십년대 중반에 태어나셨고 이천년대 초반에 돌아가신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정확한 연도는 모르겠어요.그다음에 오늘 조연으로 많이 등장할 김현옥 서울시장이 육사 3기예요. 육사 8기가 주도 세력이었고요.

 

 

2-3. 본론: 기공의 기능과 역할

그리고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라고 하는 게 어떤 회사가 이제 1960~80년대까지, 심지어 90년대까지 한국 경제 정책의 첫 번째 목표는 외화 자산 확보. 20세기 현대건축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를 통틀어서 한국이 경제 성장을 하는 모델이 외화 절감입니다. 수입하지 않고 수입 대체제를 만든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안타깝게도 외국 자본 공장이 하나도 없었고 현대자동차 독점했고 그다음에 건축 분야에서 우리나라 정부처럼 2차 세계대전 전에 식민지 지배를 겪었던 많은 나라에 외국 건축가들이 직접 들어와서 작업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거든. 근데 한국은 없어요. 모종의 방식으로 그게 인력이든 상품이든 직접 달러가 나가는 방식으로 돈을 쓰지 않고 대체재로 가려고 하는 게 이제 한국 개발 정책의 가장 핵심이거든요. 그런데 1962년부터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하고, 67년에 본격적인 제2차 경제개발 계획을 시작하려고 할 때 이제 이슈가 되는 게 그거잖아요. 공장을 어디에 지을 것인가 항만을 어디에 지을 것인가 도로를 어디에 지어야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낼 수 있는가 예비 타당성 조사 같은 거잖아요. 양평 고속도로처럼… 그럴 때 예비 타당성 조사를 해야 되는데 그걸 엔지니어링 업체가 해야 되는 거예요. 우리나라 업체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 역시 일본 업체 외국 업체한테 나가는 달러가 아까워서 박정희가 김종필한테 '임자 자네 이런 거 하나 만들어 봐.' 했고, 카더라. 통신이지만 김종필의 오른팔, 석정선한테 불러서, '야 네가 좀 해봐' 했고 석정선이 김수근하고 친해요. 석정선의 자택을 김수근이 설계를 했어요. 그래서 이 커넥션 속에서 '석정선이 김수근을 불렀다'라고 하는 게 구술에 의해서 확보된 증언밖에 없어요. 문서가 남아 있는 건 없는 것 같고. 이 두 사람이 육군사관학교 출신들 중에서 고등사범학교를 나온, 나름 문과 엘리트들이었어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김수근을 불렀던 거죠. 석정선이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만 만든 게 아니라 한국경제개발협회, 한국해외개발공사, 코이카 같은 거에 전신이 되는 회사들을 다 만들었어요. 역대 사장 이게 공식 30년 사에 발간된 책자의 사진이에요. 남다른 걸 우리가 알 수가 있죠. 이분들은 군인이 아니구나라는 걸 이 사실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1963년도에 국제산업기술단으로 출범을 했고요. 그러고 나서 아까 말한 이 석정선과 박정희 김종필로 이어지는 커넥션 속에서 코리아 퍼시픽 컨설턴트로 변경이 됐고 1960년 66년도에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로 변경이 되고, 상공부 지정 타당성 조사 용역 기관으로 지정이 됩니다.

 

 

2-4. 본론: 기공의 건축가 김수근과 기대 효과

그리고 당시에 직원 200명 이상이 되는 엔지니어링 업체, 아까 말씀대로 건축 설비가 주 업무가 아니라 울산 공장, 경부고속도로 소양강댐 그다음에 화학 비료 공장 등을 어디에다 지어야 되는가 등등을 엔지니어링 하는 회사를 만들었고 김수근 입장에서 보면 김수근 선생님이 86년인가 돌아가시잖아요. 52년도에 60년대 초부터 활동했다고 치면 80여년 정도까지 한 25년 정도의 커리어밖에 안 돼요. 굉장히 짧은 커리어 동안 한국종합기술개발 공사와 얽힌 기간이 7~8년 정도 되니까 절대 짧은 시간이 아니죠. 대체로 김수근에 대한 어떤 모노그래프가 몇 종도 되지도 않습니다만 정인하 선생님이 쓰신 책도 그렇고 많은 김수근에 대한 기본적인 서사는 66년도에 부여박물관으로 곤혹의 시기를 겪고 난 다음에 최순 선생을 만나서 한국성에 눈뜨시어 1971년도에 그 공간사옥 같은 걸 지었다는 신화로 설명된단 말이죠. 근데 그 사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가 오늘의 주제입니다. 김수근 선생뿐만 아니라 그 밑에 윤승중, 유걸 목천 구술집에 등장하시는 분들이죠. 30년대생 1세대 건축가들, 그다음에 김원, 김석철 그다음에 김한 김원석 그다음에 모형으로 유명한 기흥성까지 한국종합기술개발 공사에 계셨어요. 그리고 건축 프로젝트는 세운상가, 여의도 마스터 플랜, 구로 한국 무역 박람회, 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 한국관 등을 했지만 이게 주 사업이 아니라 아까 말씀드린 대로 경부고속도로, 삼일고가, 소양강, 포항제철 ,남대문 시장, 그다음에 한국냉동기계 거기 노량진에 있는 한국 수산시장의 전신입니다. 이런 것들을 다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에서 도맡아서 엔지니어링을 맡았어요. 건축부와 도시계획부가 있었고 그 밑에 온갖 하위 분과가 많았는데 왜 김수근이 사장을 했을까. 김수근이 아는 게 뭐가 있어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라는 거죠.

 

그리고 이제 석정선은 넘어가겠습니다. 넘어가는데 이 사람이 온갖 일을 다 했는데 석정선과 김수근의 연결고리는, 석정선이 워커힐 호텔에 책임을 맡았어요. 잘 아시다시피 1963년도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공화당이 돈을 만들기 위해서 만든 대표적인 프로젝트들이죠. 휴가 때 일본에 가서 유흥을 즐기는 미군들을 한국에 붙잡기 위해 만든 게 워커힐 호텔이고 그래서 90년대까지 유명했던 거는 워커힐 쇼였죠. 그리고 이 힐탑바를 김수근 선생이 했는데 이 워커힐 호텔의 총 책임자가 석정선이에요. 이때 김수근과의 커넥션이 생겼을 거라고 하는 게 추측이고요. 증권 파동 1960년대에 있었던 모든 일에 숨은 그림자처럼 석정선이 있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일본 공영의 일본도 마찬가지로 전후에 전후 복구와 재건을 위해서 필요한 엔지니링 업체를 만들었는데 그 회사 이름이 일본 공영이었거든요. 그래서 이를 모델로. 1968년도에 김수근 선생님 사진인데요. 68년도면 37, 38세예요. 이런 포스가 나온다는 거.. 일본 공영이 했던 거가 제일 처음에 했던 게 도쿄 수도 고속화 도로가 첫 번째 프로젝트고 도메인 고속도로를 개통했는데 우리가 했던 것과 똑같아요. 삼일고가, 그다음에 경부고속도로. 그래서 한국에 자체 생산되는 모터 자동차가 포니가 아직 생산되기 직전, 그러니까 다 조립해서 자동차를 만들던 시절에 왜 이런 고가도로가 서울에 필요했을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저 효과가 필요했던 거죠. 건축가를 동원해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추구하는 걸 잘 따라오면 도래할 무대가 이러하다라는 것을 국민들에게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하지 않았나 하는 게 저의 생각이고요.

 

 

2-5. 본론: <세운상가>와 <원남로 퇴계로 영천 지구 재개발>, 그리고 <서울 마스터 플랜> 비판

이제 개별적인 프로젝트를 몇 가지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첫 번째가 1967년도에 세운상가. 이 건물 모르는 분들은 아마 없으니까 긴 설명을 요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일제시대 때 공습에 따른 화재가 계속 도시를 통해서 퍼져나가는 걸 막기 위해서 소개 공지를 만들었고 이게 빈 땅으로 남아 있었던 거죠. 그래서 1966년도부터 1년 만에 번갯불에 콩궈 먹듯이 세운상가를 만들었네요. 이게 한국에서 지어진 도심 재개발 사업 1호. 얘를 시발로 도심 재개발을 하려고 했었던 거죠. 무지막지막한 계획. 그래서 이게 당시에 김수근 건축 엔지니어스 어소시에이츠라고 되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종합기술개발공사, 기공에서 설계를 했고 담당자는 윤승중 선쟁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초기 계획안은 트러스로 거대한 구조로 보행 도로를 만드는 것이었는데 이거는 구현되지 않았고요. 196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에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몰아붙이지 않았으면 결코 지어질 수 없었던 건물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내부 사진의 모습이고요. 

 

세운상가가 지어지고 있던 그 시절에 김수근 건축 도시 연구실에서 <원남로 퇴계로 영천 지구 재개발을 위한 조사 및 기본 계획>이라고 하는 걸 1967년도 1월에 발표는 아니고 서울시에 보고를 해, 이 세운상가를 짓는 양쪽에 종묘가 있고 남산 자락으로 이어지는 이 세운 상가를 지은 김에 그 좌우 8개의 블록을 통째로 다 이노베이션을 하자라고 하는 계획을 세웠어요. 이게 지어지지 않고 있다가 최근에 지어지고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보고서를 누가 쓴 걸로 추정되는가하니 김석철 선생님입니다. 1943년도 생이고 서울대 건축학과 나와서 김수근 사무실에도 있었고 김중업 사무실에도 잠깐 있었던 1980년대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대표적인 건축가인데 그분이 이런 말을 해요. "서울 마스터 플랜이 열심한 성실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차질적이었던 것은 도시와 도시 계획이 갖고 있는 유연적 여러 측면을 외면한 연유였다." "서울 마스터 플랜은 대단히 대수롭지 않은 계획이다." 라는 말을 이렇게 이 보고서에서 써요. 서울 마스터 플랜이라고 하는 게 뭐냐면 아까 그 건설부 장관 하셨고 국토계획학회장을 오래 하셨던, 한국 도시계획계의 대부라고 말씀드렸던 주원 선생이 1966년도에 발표를 해요. 이 계획은 기본적으로 서울을 사대문 안을 중심으로 두고 영등포, 여의도 그다음에 신촌, 고양으로 넘어가는 곳 그다음에 잠실.. 강남은 아직 머릿속에 들어와 있지 않았고, 영동으로 넘어가는 요 언저리를 중심을 두고 동심원을 두어 이렇게 원형으로 확장되어 나가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상식적인 계획이잖아요. 그런데 1909년생이 쓴 주원 선생이 이 66년도에 만든 서울 도시 기본 계획을 43년생이 스물다섯 여섯에 대수롭지 않다고 했던 까닭이 있습니다. 이분들이 염두에 뒀던 거는,  간단하게 말해 동심원을 중심으로 원형 계획이 있고요, 한편으로 리니어 계획이 있는 거예요. 주택 도시및지역계획연구실HURPI 라는 기관에서 끊임없이 밀었던 도시 계획 방식이 리니어 방식입니다. 이 계획은 허피HURPI의 핵심 멤버였던 사람들이 다 떠나고 나서 1968년 8월에 경인지역 토지 이용 구상도, 여의도에서부터 인천까지 이 영역을 리니어한 선형 계획을 허피에서 발표를 했는데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기공 사람들은 이 계획을 좋아했어요. 원형 계획을 대체로 거부하고 리니어 플랜을 옹호하는 입장이었거든요. 그래서 이 계획이 대수롭지 않다고 말한 거고, 세운상가 일대 8개 구역을 전부 다 도시 재개발을 하는 엄청난 제안을 했죠. 몽상적이고 현실성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확대한 그림인데요. 지하철 지나가고 공연장도 있고. 김석철 선생님이 역시 그렸다고 밝혀져 있어요. 유걸 선생님께서 보시더니 김석철이 그린 거라고 증언을 해주셨어요. 물론 증언밖에 없는 게 이 연구의 가장 큰 단점입니다.

 

 

2-6. 본론: <여의도  개발 마스터 플랜...>의 이상과 실제

기공의 두 번째 계획이라고 할 수 있는 게 건축 분야에서 여의도 개발 마스터 플랜이 1968년 8월 1일에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에서 보고서를 만들어요. <여의도 개발 마스트플랜을 위한 전제와 가설 그 하부 구조의 의 제안>이라고 도시건축연구실의 담당자인 윤승중, 김원 이런 분들이, 김수근 팀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이 여의도 마스터 플랜을 만들어요. 여러 버전이 있는데요. 이게 이제 '메가마스터플랜'이라고 여기에 국회의사당 한쪽에 두고 이쪽에 병원 같은 것들을 두고 그 위를 보행도로로 만들어서 이 여의도 전체를 하나의 단일한 계획 범위로 안에 놓는 거대한 메가스트럭처를 68년도에 제안하죠. 그런데 좀 읽어보면 이 플랜이 1968년 초 8월에 제출되거든요. 6개월 만에 만든 보고서 같아요. 그런데 원형 계획을 비판을 해요. 5km권 10km권 15km권 동심원을 그려나가는 것으로부터 서울의 모든 도시 구조 형태를 연역해 보려고 하던 과거의 방법을 버리면 안 된다. 주원 선생이 했던 서울시 도시 계획 에서 했던 걸 폄하하면서 다시 한 번 리니어 플랜을 주장하죠. 그래서 여의도를 거쳐서 인천까지 달리고. 공간 발행인이 아까 말한 석정선이었어요. 김수근 초대 발행인이 아니고 22호까지 아까 석정선이라고 하는 육사 8기가 발행인이었어요. 그런데 이제 그때 69년 4월 호 특집에 68년 8월에 만든 보고서를 69년 4월에 공간에 그냥 그대로 실어요. 이게 가능했던 까닭은 공간 잡지가 종합기술 개발 공사하고 분리될 수 없었다는 또 하나의 증거 같은 거죠.

 

그런데 제목도 똑같고 내용도 똑같은데 그 사이에 모형이 바뀌어요. 아까는 위에 인공 대지가 이렇게 약간 각져있던 데 반해서 이제 원환 구조로 바뀌었잖아요. 김석철 선생이 우리가 어디 나갔다 오니까 이렇게 둥글둥글하게 바꿔놨더라고 하는 증언이 있어요. 기본적인 구도는 비슷합니다. 한쪽에 국회의사당을 두고 여기에 시청과 병원 같은 걸 두고 보행 도로를 콘크리트 구조물로 지상에서 띄워서 보차 분리를 하는 이 계획 구도를 만들었어요. 디테일한 모형을 사진. 그리고 지역 계획도, 공급 계획도 같은 것들을 만들었는데 그런데 얘가 버전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1969년도에 기공에서 만든 보고서가 서울시로 넘어가서 <여의도 및 한강 연안 개발 계획>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바뀌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리니어 플랜을 끊임없이 주장하고 있어요. 그래서 서울 도심에서 여의도로 이어지고 이게 인천으로 연결되는 똑같은 구도가 반복되죠. 여기에 국회, 종합병원, 시청, 대법원. 저기엔 업무지구, 여의도 전체에 인공대지를 두고. 단게 겐조의 도쿄만 계획, 인공 대지와 거대한 도로를 만들어서 도시가 증식해 나가는 구도로 만든 그 계획을 참조하지 않았을 리 없죠.

 

그런데 1969년도에 김수근 선생이 기공을 다 떠나서 허피라고 하는 조직도 다 와해가 되기 시작하고 1970년대에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기 시작하거든요. 그래서 1971년도에 국토계획학회에서 아까 또 주원 선생님 나오죠, 주원, 고석관, 윤정석, 의용이 전부 다 서울대 도시계획학과 도시공학과 선생님들이 1966년도에 만든 서울 도시 기본 계획을 조정하는 안을 만들어서 발표를 해요. 그래서 이때 동심원 계획에 대한 재확인이 일어나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동심원 계획을 서울 도시 계획이 굳어지죠. 이 발표가 난 다음에 1971년도에 다시 한 번 서울특별시 한강 건설 사업소에서 <여의도 종합개발 계획>을 내는데 여기서 기공이 만들어냈던 저 안들이 전부 다 완벽하게 버려져요. 그리고 이런 말을 하죠. "서울 인천에 이르는 거대 도시 건설의 전초 기지로 개발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여의도가 현 도심의 기능을 전부 흡수할 수는 없을 것이며 현 도심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도 없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서울 마스터플랜과는 물론 국토계획과도 연계되어 무리 없이 그 위계가 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필연성이 희박한 이상이 도출되거나 목적의 실적 수립에 급급한 나머지 냉엄한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60년대에 기공의 제안은 택도 없는 소리다, 그런 시절은 갔다는 걸 공식적으로 알리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죠.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여기는 대체로 이 계획에 따라 지어졌어요. 고층 상업지구가 있고 여기 뒤에 아파트 단지 여기에 종합병원 대신에 63빌딩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기본적인 이 구조가 크게 바뀌지 않고 여의도에 자리 잡게 되는 거죠.

 

 

2-7. 본론: 1968년 구로 한국 무역 박람회

그리고 기공에서 했던 또 흥미로운 프로젝트가 구로 한국 무역 박람회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구로 디지털 단지의 전신이죠. 그러니까 68년도면 62년도에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하고 67년도에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하는데, 이때 한국에 돈이 있어야 경제 개발을 하려면 결국 시설 투자를 해야 되는데 그 자금을 어떻게 확보할 건가? 결국 달러 확보가 핵심 과제였는데 수단이 없는 거예요. 미국이 원조를 점점 줄여나가고 있는 와중에서 새로운 시설 투자에 대한 여력이 없었죠. 그래서 박정희 정권에서 아이디어를 낸 게 뭐냐면 재일교포들 중에 사업가들을 위한 공단을 조성해서 여기서 사업을 하게 만들자라고 하는 게 구로 공단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공단 조성 명목으로 구로동 일대 토지를 수용을 합니다. 수용이라고 하는 건, 땅을 안 팔면 안 되는 상황인 거예요. 강제로 팔아야 되는, 알박기 불가능하고. 그래서 이게 64년도에 군용지였기 때문에 쉽게 수용할 수 있었다 그러는데, 2008년에 결국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터지고 구로공단 농지 강탈 국가 배상금 총액이 9,181억 원 정도였어요. 60년대 중반에 박정희 정권이 땅을 강탈해서 구로공단을 만든거지요. 처음 목표는 재일교포 전용 공간을 만드는 것이었는데 점점 그 목표는 무색하게 되고 내국인이 점점 늘어나게 되는 거죠.

 

아무튼 1단계 입주가 끝나고 2단계 공간을 새롭게 조성하면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서 만든 게 한국 무역 박람회. 여기에 기공 건축가가 동원이 돼요. 흥미로운 거는 건축가 기공에서 건축을 담당하는 부서가 2개가 있어요. 하나는 도시 계획부, 하나는 건축부예요. 1진은 도시계획부예요. 전부 다 서울대 출신이에요. 2진은 건축부, 홍익대 출신이 대부분이에요. 약간 묘한 구도가 있는데 그 구도에서 1진한테는 이 당시에 아까 여의도 종합개발 계획이라든가 이따 살펴볼 오사카 엑스포 같은 것들을 맡겼는데, 2진한테 한국 무역 박람회를 맡겼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점은, 무역 박람회를 왜 하는가. 내수용 무역 박람회라 외국인이 거의 안 가요. 자동차가 별로 없는데 고가도로를 만드는 것과 거의 비슷한 목적으로, 국가주도 경제개발 계획이라고 하는 게 장밋빛 미래이고 이것을 대국민 홍보하는 장치, 굉장한 프로파간다의 작업이었던 거죠. "우리는 아시아에서도 새 물결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신생국이 정치적 독립과 경제적 자립을 성공적으로 달성하는 본보기를 보이는 일이며 민주주의가 공산주의보다 더 능률적인 경제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이는 (...)" 지금은 택도 없는 얘기지만 6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의 국민 소득이 더 높았어요. 그래서 박정희 정권은 끊임없이 우리 체제가 북한의 김일성 체제보다 더 우월하고 탁월하다라고 하는 걸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장치를 만들었어야 되는 거죠. 그게 이제 무역 박람회의 일환이고요. 1968년도에 한국 무역 박람회가 이렇게 개최되게 됩니다.

 

박정희가 와서 치사를 하는 모습이고요. 195,60년대가 지금보다 건축 전시가 더 많았던 대전시회 시절이라고 저는 생각이 들어요. 건축 잡지도 없고 건축을 홍보할 수 있는 매체라고 하는 게 tv kbs가 아직 텔레비전 방송을 주기도 직전이거든요. 그래서 사람들한테 직접 보여줄 수 있는 게 무엇인가 결국 전시었어요. 그래서 공보실 공보관이라고 하는 건물 안에 끊임없이 전시를 했었고요.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모형 전시회, 66년 초 경제개발 전시회, 도시계획 모형 전시회 이런 전시들을 끊임없이 개최를 하고 그 끝머리에 하나 있는 게 1968년 한국무역박람회였죠. 당시 1960년대 박람회를 하면 지역관은 이랬어요. 충남관은 이런 불상을 만든다라든가 그다음에 한옥 기와를 만들어서 입구를 만들고. 강원도는 산이 많다는 식으로.. 지역적 특색을 모방해서 만들어내는 전시관을 만들어내는 게 기본적인 구도였는데 이건 국내외를 막론하고 마찬가지였죠.

 

 

2-8. 본론: 1967년 몬트리올 엑스포 한국관

1967년 몬트리올 엑스포 한국관도 그 당시에 기공 윤승준 김원이 다 했어요. 저 당시에 한국이 맡았던 모든 국가 프로젝트의 프로파간다 역할을 하는 거의 대부분의 일들을 기공에서 다 맡아서 해요. 그래서 이때 67년도 몬트리올 엑스포의 한국관에 결국 또 목구조 갖고 나가는 거고. 그리고 이제 1961년 몬트리올 엑스포에서 이제 많은 사람들이 가장 충격을 먹었던 거는 벅민스터 풀러의 지오데식 돔도 있었지만 오토 프라이의 막구조예요. 이게 이제 1970년대 뮌헨 올림픽에서 이제 꽃 피우게 되는 그 전신이 1967년도에 있었는데 한국과 현장 감독을 지낸 재미 건축가 분이 공간 잡지에 그 엑스포를 참관하고 나서 글을 써서 보냅니다. 엑스포 통신 한국관 현장 단독 리포트에서 본 것 중에 독일관이 제일 멋있다. 어떻게 보면 서커스의 천막까지 보여지나 신체적으로 유동성 있게 돌아가면서 볼 수 있게 구성된 공간들이 무척 흥미로울 것 같았다라고 하면서 그 현장을 거의 실시간으로 공간에다가 이렇게 소식을 보내고 있었고, 그러니까 공간이라고 하는 건 기공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던 잡지를 말하는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죠.

 

그래서 이때 1968년 한국 무역 박람회 기념물 전체 공사를 책임했던 거는, 기공 건축부의 김원성 1939년생이고 홍익대학교를 다니고 있다가 1970년에 이제 김수근 팀이 다 떠나면서 기흥성 선생도 기공을 떠난 것으로 되어 있었고 그때 목표가 "기존 시설을 가지고 박람회 축제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래서 축제 무드를 강렬하게 유발할 디자인 어트렉션의 방향을 우리의 농악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컬러와 영구 구조물이 아니라, 간편한 구조로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구조였던 철 파이프와 캔버스를 주 재료로 한 스마트한 구조물로 우리의 노력을 집중해서(...)" 그래서 한국에서 개최한 저 당시 박람회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지역적 특색을 버리고 경량 철 구조로 만들어낸 무역 박람회 전시관의 모습입니다. 독특한 방식으로 사회 전반 또는 기공을 중심으로 있었던 약간의 모더니즘 정서하고도 맞닿아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한국 무역 박람회 개최 기념으로 우표를 만들었고, 연달아 70년에 1년 뒤에 2년 뒤에 있었던 만국박람회의 한국관 참가 기념으로 또 우표를 만들었는데 이런 거죠. 한국의 전통적인 것이 없고 어떤 의미에서 굉장히 모던하죠. 테크놀로지 지향적인 초보적인 막 구조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그런 것들을 좀 과시하는 듯한 모습이였고요.

 

 

2-9. 본론: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와 한국관

그다음에 이제 오사카 만박으로 넘어가는 건데요. 한국이 외국에 참여한 만국박람회 엑스포의 한국관 중에서 유일하게 전통 냄새를 없앤 첫 번째 시도라고 봐도 무방해요. 70년 오사카 만국 박람회가 대단히 중요한 분기점이잖아요. 특히 일본 건축의 역사에서도 그렇고 박람회 역사에서도 그렇고 일본 현대사에서는 분기점이 틀림없죠. 20세기 소년이라는 불후의 걸작 만화 오사카 만박을 둘러싼 일본 사회의 변화 그다음에 종교 집단 같은 것들의 얘기잖아요. 그래서 한국이 주로 만국 박람회에 참여를 하면 이런 모습이었었다. 1893년 시카고 콜롬비아 엑스포 한국과 백색 신화를 자랑했던 시카고에서 있었던 만국 박람회에 한국관에 참여했는데 이런 모습이었고 아르누보의 시발점이었던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도 기와 건물을 갖고 갔고 좀 전에 말씀드린 대로 67년 몬트리올 엑스포 한국관에서 이걸 갖고 갔고 1970년 코리아 파빌리온이라고 정부가 경회루를 하라는 내부 방침을 갖고 있었죠요. 그런데 기공에 윤승준 김원 선생이 윤승중 선생님이 전시 준비하면서 제일 힘든 게 이거 하자고 설득하는 거였다고 말합니다. 아무튼 그 설득이 먹혔고 김원 선생님의 스페이스 프레임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1969년도에 김수근 선생이 기봉 사장에서 물러나고 오사카 엑스포를 준비하기 위해서 인간 환경계획 연구소를 설립하고 1년간 미래학 세미나를 합니다.

 

그래서 이때까지 한국관이 했던 전략은 전통적인 외관을 차용한 한국관 파빌리온을 만들고 그 안에다가 한국의 공예품이나 한국적인 특성을 잘 드러내는 미술품 등을 전시하는 게 한국관의 전략이었는데 처음으로 한국에서 외국에다가 전시를 하는데 그것도 이제 일본이잖아요. 1945년까지 식민 지배를 당하고 있던 나라에서 25년 만에 그때 이제 전시를 하는데 한국적인 거 하지 말고 미래적인 것을 우리가 해보자라고 했던 게 김수근 팀의 아이디어였고 인간환경계획 연구소를 그래서 만들었어요. 그래서 당시 여러 세계사적인 맥락에서 보면 환경이라고 하는 걸 캐치한 거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1년에 미래학 세미나를 하는데 이때 등장했던 인물들 중에 제일 유명한 사람이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작가이었었어요. 그리고 이제 공간이 자기 잡지니까 우리나라 잡지 역사서 이렇게 파격적인 지면이 있었습니다. 이게 <미래학 개관>이라고 최정호 선생이 쓴 글인데요. 첫 페이지는 꽉 차있지만 다음 페이지부터 한 칼럼씩 없어져요. 대단한 파격적인 레이아웃이죠. 이 잡지가 69년 11월 호인데요. 잡지 통째로 이 미래학 오사카 엑스포를 어떻게 우리가 준비해야 뒤쳐져 있는 한국 변방에서 미래를 어떻게 따라잡을 수 있는가를 특집으로 책 한 권을 만들었는데요. 조판이 이렇게 올라가 있다라든가 글자 위에 이렇게 막 손으로 쓴 거를 다시 한 번 인쇄를 한다는 거. 근데 여러분 이때 컴퓨터로 하는 게 아니고 아시죠? 이거 글자 하나하나 이렇게 박아서 인쇄를 해야 되는 시절이거든요. 굉장히 파격적인 방식으로 당대성이라고 하는 걸 포착하려고 하는 노력을 전방위적으로 펼쳐나가요.

 

그래서 이렇게 여기 처음에 크롬으로 완벽한 크롬 기둥 비스의 바스라 파밀리온의 집자 크롬 기둥처럼 바깥으로 완벽하게 반사시킬 수 있는 이 정도의 크롬 기둥으로 하고 싶었는데 당연히 기술력과 자금 부족으로 못했고 근데 이거는 뭘까요? 한국이 일본하고 이렇게 맞짱을 뜰 때 언제나 내세울 수 있는 첫 번째 인물이 있잖아요 이순신 그리고 거북선입니다. 오사카 한가운데 거북선을 진출시키려고 했었던 거고요. 그 안에 이제 미래 전시실이라고 하는 관이 있는데 당대 가장 실험 미술 같은 것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던 박성호 선생이 허의 공간, 엑스포 70 한국과의 미래 전시관 스케치 같은 것들 했었어요.  그런 걸 하고 있다가, 여담입니다만 정부 국무총리가 오사카 엑스포를 참관하러 온다라고 해서 중간에 한번 전시물이 바뀌어요. 그분이 올 때 한국적인 것을 보여줘야 돼가지고. 김수근 팀의 노력, 어떤 의미에서는 기공이 하려고 했었던 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당대의 미래를 포착해서 현재에 구현하는 것이 기공 팀이 하려고 했었던 역할이에요. 그래서 그 엔지니어링 업체의 역사에서 66년부터 70년까지 한 3년 반 동안 저렇게 약간 어떤 의미에서 한국 건축 역사에 유래를 찾아보기 없을 정도의 아방한 모던한 프로젝트들을 종이 위에서나마 그려볼 수 있었던 이유가 그 역할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저희가 지난주까지 사이버네틱스를 건축 이론 특강으로 배우지 않았겠습니까? 사이버네틱스라고 하는 게 인간과 환경과 기계 모든 것들을 다 동등하게 제어하고 통제하는 어떤 방식이었잖아요. 이를 가장 건축적으로 처음 구현한 엑스포가 1970년 오사카 엑스포예요.  이게 단게 겐조가 설계한 축제 광장의 거대한 지붕이고요. 이 지붕 밑의 환경을 어떻게 컨트롤하는지를 맡았던 사람이 아라타 이소자키. 그때는 이런 모니터가 아니라 자기 테이프 같은 것들로 이 전체 구도, 이게 태양의 탑, 지붕이잖아요. 여기에 도면과 온갖 장비들을 어떻게 통제할 건가를 그가 맡았습니다. 잘 모르시는 분들 계실 텐데 이게 아라타 이소자키가 만든 데몬스트레이션 로봇이에요. 실제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꼬마들이 막 이렇게 군무 중에 갑자기 난입해가지고 약간의 혼란이 벌어지기도 하고. 그러니까 이런 것들을 우리나라 건축가들이 보고 온 거죠. 막상 가보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미래가 이게 아닌가 보다, 그리고 이게 오사카 엑스포의 주체 측만 그린 게 아니라, 펩시가 오사카 엑스포의 관을 하나 만들었어요. 그런데 eat라고 영국 베이스의 예술가 테크놀로지, 온갖 기술자들이 다 모인 어떤 그룹이 있는데 eat라고 하는 데서 여기서 이런 거 해요. 벌써 70년에 포그스 컬쳐라고 하거든요. 안개 조각 같은 걸 만들어서 통제하고 막 건물 막구조로 움직이고 이런 것들을 했었어요. 이게 1970년 오사카 엑스포가 사이버네틱스의 분기점이라고 평가하더라고요.

 

한국 건축가들이 이거를 보고 왔다. 이게 이제 오사카 엑스포 끝나고 찍은 사진인데요. 윤승중 선생님 35년생이라 그랬고 기본 전생이 43년생이거든요. 20대 여러분 나이에 한국 한국관을 총 책임하고 돌아온 거예요. 그러니까 저 당시에 이분들이 맡았던 역할이 또는 무게가 어떤 것이었을까 짐작하기도 힘들고 이분들은 도대체 무슨 패기와 생각들로 저런 야심찬 일들을 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어요 솔직히 말하면. 그런데 아무튼 그 시대에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라고 하는 거 그래서 이거는 기공이 생각했던 미래가 딴 나라에는 현재 또는 과거였을 가능성이 커요. 그리고 놀랍게도 기공을 떠난 김수근과 윤승중이 저 때만큼 저렇게 큰 프로젝트 야심만만한 계획안들 안 하거든요. 김수근 선생님은 오히려 벽돌로 돌아가고 나중에 이제 김현섭 선생님이 얘기하실 것 같아요.

 

2-10. 본론: 대한주택공사

그리고 주공이 있는 거예요. 기공이 있고 주공이 있어요. LH 전신인 주공이 있는데 기공만큼 저 시대를 위해서 만들어진 기관은 아니죠. 여러분 잘 아시는 것처럼 1941년도에 일본이 주택영단이라고 하는 걸 설립을 하고 일본에서 만들었으니까 한국에서도 만들어야 되는 거죠. 내선일체니까 한 달 만에 만들잖아요. 이게 좋은 의미로 생각할 수는 없는 거지만 그러니까 20세기 초 중반에 많은 유럽 국가에서도 노동자 주거 그다음 도시 빈민 주거를 공공에서 어떻게든 해결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여러 가지 기구들이 있는데 주공도 그중에 하나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다가 1945년도에 해방과 함께 미군정 들어가고 적산이었으니까요, 이관되었다가 1962년 7월 1일 대한주택공사가 대한주택영단으로 바뀝니다. 제가 미리 말씀드리면 기공은 제가 웬만큼 연구했지만 주공은 故박철수 선생님의 연구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는, 제가 더 이상 할 게 없을 정도로 다 하셨기 때문에 그냥 요약 정리만 했다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장동훈 씨가 육사 8기 61년 5월 28일 그러니까 5월 16일 날 군사쿠데타 하고 12일 만에 대한주택영단 이사장에 취임을 해요. 이 사람이 그 당시에 미국 물도 먹고 고등군사관 연구 통해서 온갖 문물을 겪어온 사람이고 1963년까지 주택공사 초대 총재를 지내다가 64년도에 이제 주택공사에서 떠나요. 왜 떠났는가 하면 63년도에 아까 대통령 선거도 있고 정치 일로 하러 갔다가 68년도에 다시 돌아와요. 그리고 4대 총재를 지냈고 66년도에 애국선열동산관리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아서 광화문에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을 이때 이 사람들이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영단주택이라고 하는 게 1943년 이전에도 있었다, 이런 거고 그다음에 넓은 의미의 영단 주택으로 볼 수 있다고 박철수 선생께서 평가하시는 부산의 인프라 주택 등등이 있었는데 주공에 대해서 더 연구가 필요하다면 1950년대, 60년대 초까지 주공의 한국의 많은 건축가들이 일을 했어요. 박병주, 엄덕문, 김중업 선생도 전부 다 주공에서 일을 했어요. 왜냐하면 그 당시에 한국의 건축가들이 민간에서 건축 행위가 거의 안 일어났기 때문에 국가 공무원으로 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었거든요. 그래서 그때 도대체 그들이 무슨 일을 했을까는 조금 더 연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2-11. 본론: 마포주공아파트

오늘의 맥락에서 제일 중요하고 저는 어떤 의미에서 한국 20세기 현대 건축 최대의 문제작은 마포주공아파트라는 생각을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람들이 1961년 쿠데타를 하고 63년도에 민정이양을 하고 대통령 선거를 치르기로 할 거잖아요. 그때 여러 가지 프로젝트들을 하는데 그중에서 제일 중요한 프로젝트가 마포주공아파트죠. 이 도시가 어떻게 이렇게 변모될 수 있는가라는 거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왜 중요한가 하니, 마포주공아파트가 첫 번째는 처음에는 임대하다가 다 분양을 해요. 그 이후에 한국 서울시와 대한민국 정부가 도시 개발을 하고 도시재정비를 하는 방식이 딱 저거 하나밖에 없어요. 전부 재개발 구역으로 묶고 이 토지주들이 모든 공사비, 인프라 공급을 감당하고 정부는 아무것도 안 하는 거예요. 이 개발 방식이 마포 아파트에서 처음 시작되었다는 게 저에겐 너무 큰 사건이고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어떤 시스템이 거기에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해요. 전 세계 어느 도시에 이렇게 사유지만으로 주거지가 끊임없이 펼쳐지는 동네가 있는가 그리고 그 사유지가 점점 늘어나는 동네가 있는가라고 하면 없죠.

 

그래서 처음에 11개 주거동 여러 가지 유형별로 만들었어요. 대단히 야심찬 계획이었죠. 엄덕문 선생이 관여한 걸로 기록에 나와 있고 흥미로운 거는 박철수 선생님이 처음으로 발표한 자료를 검토한 내용이지만 당시에 우리나라 경제 정책을 다 좌지우지하는(특히 세금)  미국 경제협조처에서 실제로 세금을 한국이 짜는 게 아니고 저 당시에 미국이 짜서 주면 한국이 시행하는 수준이이었다. 그래서 대한주택영단이 이런 계획안을 들고 우리 이런 거 할 테니까 돈 좀 주세요 라고 하고 보고서를 보내요. 그런데 저렇게 하면 말도 안 된다라고 하는 문서를 보내요. 그런데 이 수준이 여러분 처음 대학 와서 2학년에 설계를 했을 때 그 틱도 왕창 깨지는 그 기분 같은 거예요. 모든 내용이 다 너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라는 내용이거든요. 지정 조건에만 주목한 도면은 완성도가 너무 떨어진다. 이러한 정도의 정보만으로 시공이 된다면 시공 단가가 계속 상승할 것이고, 배치도에는 오직 도로 내에서 건축물 표시만 있고 아무것도 없다.. 제가 비아냥거리려는 게 아니라 1963년 당시에 한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건축가 예컨대 서울대 김희춘, 엄덕문 다 붙었어요. 경험이 없던 한국 건축가들이 할 수 있었던 한계를 정확히 잘 보여주는 일화라고 생각해요. 김희춘이  Y자 평면 스케치를 했고 6층 규모로 줄어들어서 신축 공사가 되죠. 그래서 파란색은 김종식, 빨간색은 대한주택공사가 노란색은 김희춘이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박정희가 1962년 12월 1일 날 치사를 하죠. 저는 실제로 치사의 내용대로 구현이 되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아파트가 저때 저런 방식으로 이런 도시 구조를 완전히 뭉개 자리에서 백지 상태로 만든 이 자리에서 만들어내는 이 방식이, 지금 도시 공공성을 사람 입장마다 다 다르겠습니다만 도시 공공성을 해치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결과적으로는 정부가 또는 서울시가 인프라를 투자를 안 해서 그래요. 도로를 다 서울시가 만들고 저 건물만 분양하고 임대하는 방식으로 변화를 어느 시점에서 했어야 되는데 이 전체를 너네가 다 알아서 계획을 하고 기부채납으로 공공 부분 내놔라고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어떤 도시 구조를 만들어낸 시발점이 여기에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누가 그렸는지 모르겠는데 이것만큼 피겨 그라운드의 구도를 20세기 63년을 기점으로 오늘날까지 60년 가까이 이어져 온 도시 계획 방식의 피겨 그라운드를 보여주는 그림이 또 있을까 싶은 생각이에요. 아라비아 숫자를 쓸 수 없어서 기호 12번과 황소로 상징되던 1963년도에 한국에서 중화학 공업과 아파트로 표상되는 핵가족 단위 구조의  71년도의 포스터가 보여주는 프로파간다로 건축이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할아버지는 시골에 있어야 되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도 아니고 핵가족과 딸 한 명의 묘사. 요점은 여기에서 저기로 바뀌는데, 실제로 건물이 얼마나 지어졌는가, 한국의 도시 구조가 얼마나 현대적으로 바뀌었는가 얼마나 근사한 공공 건축물이 들어섰느냐의 이슈가 아니라, 우리가 이 구도를 어떻게 생각할 수 있었는가를 만들어주는 어떤 시험대 역할을 했던 게 기공의 건축가들이 아닌가 싶어요. 주거 역사에서 보면 이때부터는 그냥 일사천리라고 생각이 들어요. 78년도에 지금까지 재개발되고 있지 않은 주공 5단지를 한국중합기술개발공사에서 했거든요. 그러고 나서 1979년 둔촌주공으로 바뀐 것 같아요.

 

 

 

3. 결론

 

1.

20세기 한국에서 modern architecture는

결코 자명한 대상이나 개념이 아니다.

 

2.

국가라는 행위자를 괄호치고 건축가와 시민사회를 중심에 두고

서술된 현대 건축 정전(正典)의 시선으로 한국 건축을 온전히 조명하기는 어렵다.

 

3.

발전국가는 단순히 경제개발을 추구하는 국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방식으로 국가가 경제와 사회 전체를 통제하는 국가를 말한다.

 

4.

1960년대 박정희 정권과 건축가의 조합(agencement)은

한국 건축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아방가르드적 열망과 불안을 드러냈다.

 

5.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와 대한주택공사의 역사에서 건축이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제시하는 첨병 역할을 한 시기는 1960년대 말이 유일하다.

 

6.

1960년대 중후반 국가는 건축을 동원했는가 또는

건축가는 정권에 부역했는가와 같은 이분법적 관계로 설명하기 힘들다.

 

 

정리를 해보면, 모던 아키텍처를 어떻게 설정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의 입장이 다를 것 같아요. 적어도 20세기의 6, 70년대의 한국건축을 이야기할 때 국가라고 하는 행위자를 없는 셈치고, 건축과 시민사회 만을 중심에 두고 현대건축을 서술한 서구의 시선으로는 조명하기 힘들다는 겁니다. 발전국가란, 단순히 경제 개발을 추구하는 국가가 아니라 특정한 방식으로 국가와 경제 사회 전체를 통제하는 국가를 말하는 거고요. 그다음에 1960년대 박정희 정권 건축가의 조합(agencement) 괜히 프랑스어를 한번 써봤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건축가를 동원했나, 또는 건축가가 박정희 정권에 부역했는가 이 구도는 아닌 것 같아요. 제 느낌에는 이 모든 것들을 시각적으로 과시해야 될 필요에 건축가들이 붙었다라고 하는 것은 좀 부정적인 서술입니다. (그보다는) 지금까지 한국 현대건축 전체 역사에서 가장 몽상적인 계획들을 꿈꿔 볼 수 있었던 어떤 조합과 연결망들이 어떻게 생겨났느냐를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어요. 그래서 한국 건축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아방가르드적 열망이기도 하고 저는 불안이기도 한 것 같아요. 모르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하거든요.

 

여러분, 한국 건축가들이 저기 외국 건축가들만큼 몽상적인 계획안이 없는 이유가 상상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상상력은 물적 토대에서 나와요.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SF소설이 2천년대 이후에 등장한 이유가 한국이 웬만큼 살게되어 SF적 상상이 나오는 거예요. 무턱대고 상상력이 나오지 않았다라고 할 순 없습니다. 그리고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와 대한주택공사의 역사가 생각보다 긴데,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는 80년대까지 말까지 있다가 80년대 말 ~90년대 초를 거치면서 민영화돼요. 한국종합이라고 하는 대형설계사무소로 지금도 남아 있어요. 그다음에 대한주택공사는 LH로 남아 있잖아요. 그런데 이 긴 역사에서 건축이라고 하는 어떤 도구 또는 수단을 통해서 새로운 이데올로기 그게 정권에 부합하는 것이든 아니면 상관없는 것으로 설정할 수 있는 것인지는 나름대로 하더라도,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제시하는 첨병 역할을 (이 시기 이후로는) 한 적 없는 거 아닌가 건축의 역사에서 이런 생각이 들고요. 그다음에 아까 4번 설명에서 했던 얘기인데 60년대 중반 국가가 건축을 동원했는지, 건축가가 부역했는지, 대립이나 이분법적인 관계로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굉장히 독특한 구도 속에서 공존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비판해야 될 점은 특정 건축가들이 너무 독점적으로 저 기회를 누렸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어요. 질문해 주시면 남은 시간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4. 질의응답

Q1.

서울시 동심원 계획 VS 선형 계획의 대립구도?

A1.

그냥 이게 약간 과대평가된 대립 구도라고 생각이 들어요. 당시 일종의 해게모니의 싸움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한쪽은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의 동심원 계획이 그다음에 건설부 산하의 허피는 선형 계획을 이제 꿈꿨던 것 같아요. 주원 선생은 도시계획학과 출신이 아니에요. 경제학과 출신이고 어쩌다가 도시 계획을 하신 거고 한국의 도시계획학과가 하나도 없던 시절이에요. 그러니까 그때 도시 계획서에 흘러들어갔던 사람이 건축 출신, 토목 출신들이 등이 있는데, 막 그런 것들이 생겨나고 있을 때 어떤 방식으로 서울을 이제 도시계획을 할 건가를 두고 약간의 헤게모니 싸움 같은 게 있었던 것 같고요.

그런데 실제 구현 가능한 계획 구도에서 동심원 계획이 아니었던 데는 없다. 그래서 60년대 단면을 쳐서 보면 한쪽에 선형 도시가, 다른 한쪽에 원형 도시가 있는 것 같지만, 좀 더 큰 시야로 보면 선형 도시 계획은 간단한 에피소드 같은 거고 시종일관 원형 도시였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국토계획학회가 거의 독점 기관으로 자리를 잡았어요. 그리고 도시계획과, 도시공학과가 생기면서 건축과 도시가 완전히 나뉘는 구도가 형성된 겁니다. 기본적으로 저 동심원이라고 일제가 1935년에 했던 대경성 계획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이미 구도심이 여러 개가 만들어졌었고 다만 그 구도심이 더 확장이 되는 거죠. 66년의 저 계획이 아주 새로운 건 아니었고 말씀하신 대로 그 이전에 나온 대경성 계획보다 능가하는 도시 계획 보고서가 60년대 후반 돼야 나오는 거잖아요. 그거 능가하는 조사 연구도 못하는 상황이었거든요.

 

 

Q2.

초기 공간지는 프로파간다 용도였나? 

A2.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석정선를 하는 게 인생의 프로젝트로 생각하고 kbs pd 님까지 이렇게 해서 다큐멘터리를 하나 만들어봐라 그런 적이 있어요. 근데 자료가 너무 없어요. 이분이 육사 8기지만 5.16 군사쿠데타 직전에 예편을 해요. 그래서 거기에 참여를 못해요. 결속력이 없는 이와 사업을 한 점이 대단히 예외이죠. 나머지는 다 쿠데타에 참여를 했어요. 근데 워낙 그가 똑똑한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그의 약력에 1961년 5월 20일부터 4월 17일까지 안기부 차장이었어요. 안기부장이 김종필이잖아요. 안기부를 만들고 오른팔 석정선을 불러다가 꽂은거에요. 그리고 63년도 공화당 자금을 위해서 석정선이 맡았던 일이 워커힐 호텔 또 닛산 자동차 부품을 수입해 조립해 팔았던 세나라 자동차, 이것도 정권에서 돈 벌기 위해서 한 거고. 또 주식 조작이야말로 자본주의 최악의 범죄잖아요. 그런데 한국에서 제일 큰 주식 파동이 이때 벌어져요. 모든 일의 숨은 그림자가 석정선이었고 이거 일로 1963년 3월에 서울지검에 들어가요. 그런데 한 달도 안 돼서 나옵니다. 그리고 1965년도에 일간 경제 신문이라고 하는 게, 1호 신문사. 66년부터 넘어가면 그 당시에 제일 중요한 매체가 신문이었고 일요일 날 신문을 발행을 안 하니까 국가에서 신문 1호 신문사를 만들어야겠다라고 생각으로 만들고 석정선을 사장으로 앉혀요. 그리고 석성선이 아까 말씀드린 대로 기공 그다음에 해외개발공사 모든 것들을 다 만들었거든요. 해외개발공사에서 했던 일이 파독 간호사와 하독 광부들을 외국으로 많이 보냈잖아요. 그 일을 다 이 사람이 했어요. 그래서 1928년 간호사 독일 파견 발송식을 하고 그다음 날 1월 31일 날 이분들이 비행기를 타고 독일로 넘어가요. 이 건물 뭔지 아시는 분들 이거 모르겠어.

 

김원 선생님의 증언에 따르면, 김수근이 안기부로부터 비자금을 받아와 잡지 만들자라고 했었던 거에요. 그런데 왜 석정선이 1호부터 22호까지까지 발행인으로 남아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자기가 하고 싶었는지? 발행인이긴 하지만 실제로 편집에 관여했는지? 이런 것들은 아직까지 미지수이기는 하지만 그걸로 남아 있었고 그다음에 현대 문화 영화 공사도 했고 1960년대에 가장 간단하게 말하면 1960년대에 박정희 3공화국에서 문화적인 일을 보호하는 프로젝트만이 생기면서 석정선을 부릅니다 그러다가 미국으로 떠납니다. 그래서 공간 잡지의 질문으로 돌아가면 거의 사실인 것 같아요. 제가 책에서 썼는데 그때 공간 하나 사려고 그러면 한 달 월급의 7분의 1인가를 써야 되거든요. 정말 비싼 잡지였었어요. 외부 자극이 없으면 한국에서 만들어질 수 없는 수준이었단 말이죠. 그래서 비자금이 흘러갔을 가능성이 크다. 그게 반기부 중앙정보부 자금이었을 가능성이 크고 그거는 아마도 66년 11월이니까 김수근이 기공에 본격적으로 빠져나오던 그 시점과 거의 정확히 일치해요. 그래서 김수근한테 나 좀 고생한다. 그런 의미에서 석정선이 김수근한테 얼만지는 모르겠지만 모종의 돈을 줬고 그걸 갖고 공간을 했다는.. 내용상으로 국가의 프로파간다 역할을 했는가 아니 그렇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보다는 김수근의 프로파간다의 역할을 했어요. 그러니까 국책 엔지니어링 업체에서 만드는 보고서를 지면에 막 실으니까.

 

 

Q3.

이 얘기의 연장선에서 보면 공간 잡지가 도시 계획의 측면에서 기공과의 어떤 관계를 통해서 공간 잡지를 다시 읽어낼 수 있는 것처럼, 혹시 주거 측면에서는 공간이나 주공, 또는 당대 아파트를 중심으로 짚이는 지점들이 있는지? 

A3.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여러 번 말한 적이 있지만 공간이 하나밖에 없을 때 매체로서. 꾸밈이 77년인가 나오잖아요. 한 10년 가까이 혼자 하고 있을 때 공간이 안 다룬 게 뭔지 말씀하신 대로 봐야 되는 것 같아요. 오피스텔과 주거 가운데 집합 주택은 안 다루죠.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죠. 공간 잡지가 하려고 했었던 한 가지 목표 중에 하나가 건물을 다른 시각 예술 영역하고 나란히 존재하는 어떤 걸로 설정하는 게 한 가지 목표였던 것 같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사무소, 공장은 논외로 친 것 아닌가 합니다. 그 시기의 주거에 대해서는 건축하고 주택지 대상만 집중으로 다룰 것 같고. 주공에서 만든 잡지죠. 네.

저는 평소에 좀 불만이자 관심을 갖고 있는 점이, 주거를 바라보는 관점이 남성 건축가와 여성 가정학자 이렇게 나뉘는 거예요. 이제 건축지나 주택지를 읽어보면 나뉨이 보이는데요, 어느 시점에서 이제 집은 여자의 몫으로 되면서 그 논의는 여성 지식인 중심으로 들어고 건축가는 이제 그런 세세한 부분에 관여하지 않고 어차피 집합 주택은 대한주택공사를 중심으로 설계가 되니까. 김수근 선생님도 공개적으로 아파트를 비판한 적이 있었잖아요. 그래서 그게 건축가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요?

 

말씀하신 대로 공간과 저쪽 중심의 진영에서 만들어 놓은 구도가 생각보다 꽤 오래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실제로 많은 설계사무소들이 아파트로 돈을 다 벌면서 포트폴리오도 안 넣는다라든가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잖아요. 그러니까 건축과 주거가 마치 별개의 영역으로 존재하는 것. 그렇다고 우리가 공간에게 왜 안 했냐 할 수는 없는 거죠. 당시 유일한 매체였는데 어떻게 또 다 하겠어요.. 박철수 선생님 연구에 따르면 일제시대 때부터 아파트라고 하는 게 한국에 들어와 있었는데, 아파트가 이제 결정적인 분기점이 되는 거는, 동 단위 형태가 아닌, 단지 형태로 해서 그 구도가 형성되는 어떤 특정한 분기점이 63년도에 대한주택공사에서 했던 것들이고요. 당시 정부는 건축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  같아요. 대량으로 주택을 빨리 공급한다. 그리고 주택이라고 하는 게 그냥 건물 하나 단순히 만드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경로당, 놀이터 온갖 인프라가 함께 필요한 건데, 이것들을 손 안 대고 코 푸는 방식. 아파트 지표가 설정해 두고 여기에 참여한 민간 자원이 다 알아서 하고 기부채납으로 아파트 안에 초등학교 하나 만들어서 우리 주라.. 뭐 이런 방식이 그래서 당시 정부 입장에서는 건축이라고 하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을 거라 생각이 들어요. 그냥 주택 공급 방식 아니었나. 정부가 개념을 수입해서 이렇게 해서 의도적으로 했다기보다는 여러 가지 시대 상황과 맞물려 가지고 저 녀석이 서울과 전국에 새롭게 시가지와 주거 지역을 만드는 거의 유일한 방법으로 이렇게 관행이 돼버린 거 같아요.

 

(Q4는 생략) 

 

Q5.

국가가 대타자로 등장했던 동아시아의 건축역사를 쓰기 위한 새로운 방식이 필요한가요? 혹은 참고할 만한 다른 모델이나 역사쓰기방식이 있었나요?

A5.

내가 생각하기론 한국현대건축에 대한 충분한 이해로 서양근대건축을 보면 다르게 보일 거라 생각한다. 그들의 시각으로 볼 필요가 없는 것 같다. 서양현대건축이래도 스칸디나비아, 스페인, 포르투갈이 안나온다. 가우디는 지나가듯, 알바로 시자 이전은 없다. 이어서 체코, 폴란드을 제외한 중부 유럽만을 다룬다. 전수조사한 건 아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건축으로 지어진 건물이 프랑스와 독일에서만 10%도 안될 거라 확신한다. 그만큼 서양현대건축 예외적인 것이다. 이 예외적인 것들로 서사를 만들어낸 것. 그러므로 우리 역시 고유(국가를 대타자로 설정하는)의 방식으로 한국현대건축사를 충분히 정리할 수 있고 다른 나라 역시 그럴 것이다. 비록 먼 이야기이나, 유럽의 현대건축이 오히려 예외적인 반면에 오히려 우리가 보편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앞서 이야기한 서술 방식은 8, 90년대에선 통일되진 않는다. 4.3그룹이 당시 공무원을 배격했듯 반-국가의 특성을 가진 바 있다. 적어도 60년대 시기의 건축은 국가를 빼놓고 이야기하기 힘들다는 생각이다.

 

Q6.

하나 궁금한 거 있어요. 70년도에 오사카 만국박람회 가서 엄청난 격차를 느꼈잖아요. 아까 흘러가듯이 설명해 주셨지만 그 이후에 건축가들의 작업이 이제 벽돌이나 개인적인 작업으로 돌아갔는데, 어떤 물적 토대의 부재 때문이었나요?

A6.

오사카 만국 박람회에 만들어낸 한국관의 모습이 굉장히 예외적 결과물이었던 것 같아요. 기공이라고 하는 설계 용역 회사로 직원이 몇백 명인데 그 당시에 김수근 팀에 있었던 윤승진 선생님한테 인터뷰를 해보면 자기네들은 기공 월급을 받았지만 기공 직원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거야. 나는 김수금 사람이다라는 굉장한 엘리트적인 생각과 비전과 야심만만한 얘기들을 했었던 것 같고. 저는 1971년도에 1차 완공된 공간 사옥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대단히 상징적인 건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공간적인 측면에서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직영공사였거든요. 건설회사를 안 부르고. 직접 손으로도 만들었다는 말이 있죠. 단열도 없고, 건축의 성능으로 보면 전혀 별개의 얘기가 나올 수가 있는 건물이잖아요. 그래서 다른 얘기인데 한국 건축가들이 끊임없이 한국적인 것, 정신적인 것을 찾아야 됐었던 이유도 있는 것 같아요. 오늘 60년대에 있었던 가장 대표적인 사건 사고 중에 하나가 한국적인 것을 대한 이제 탐구에 대한 얘기가 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못했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흘러갔습니다.. 

 

질문 혹시 더 없으시면 벌써 이제 2시간 정도 넘었으니까, 저녁 먹으러 갑시다. (끝)

 

 


 

단상1.

해방 이후 건축가의 창작 의지가 국가에 의해 굴절되어 실현 혹은 왜곡 혹은 좌절되었다면, 오늘날 건축가의 창작 의지에 굴절을 주는 요소는 무엇일까? 나는 건축법이나 규제 따위가 아니라 인스타그램과 유튜브와 핀터레스트를 떠올린다. 이토록 지극히 편향적인 인터넷 지형도로부터 건축지식을 습득하는게 익숙하고 편한 현대의 한국. 나는 기공 건축가들의 영웅담이나 무지막지한 설계안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당시 자신의 억압 기제를 의식하고 나름의 자율성을 쫓으려는 몸부림을 기억하고 싶다. 결국 파도 밑으로 가라앉지만(개인성으로 회귀하지만) 당시 건축의 대타자인 발전국가라는 파도를 타는 기공의 서퍼(건축가들)이 보여준 생명력을 생각한다.

 

단상2.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전국의 지자체가 유행 따라 만든 거북선 수십 척이 처치 곤란이고, 서울시의 치적 욕망과 대형건축사무소의 설계 접근 및 경쟁 행태, 주민들의 재산 증식 욕망이 얽히고 설킨 서울 압구정 개발 사업이 난항을 겪고 있으며, 정부 부처의 특정 관료 조직이 편향을 보이는 등으로 생각하건대, 과거의 망령이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 건재해 보인다.